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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제련행피해자,유가족협회 조사보고서-사죄,배상 요구
(평양 5월 24일발 조선중앙통신)과거 일제가 저지른 침략전쟁의 불길속에서 수많은 조선사람들이 억울하게 희생되였다.

조선인강제련행피해자, 유가족협회는 지난날 일제의 악독한 강제련행만행으로 하여 조선사람들이 일본 도꾜에 끌려가 고역에 시달리는 과정에 미군에 의한 공습으로 무리죽음을 당하였다는 사실이 자료적으로 립증된것과 관련하여 이 조사보고서를 발표한다.

1.도꾜에서 감행된 조선인강제로동범죄

이미 널리 알려진것처럼 무력으로 조선의 국권을 강탈한 일제는 군사적강제수단으로 1937년 중일전쟁발발이후만 하여도 840만여명에 달하는 조선청장년들을 랍치, 련행하여 침략전쟁에 소모되는 병력과 로동력을 충당하였으며 수많은 사람들을 무참히 학살하였다.

도꾜에 랍치, 련행되여 노예와 같은 비인간적인 취급을 강요당한 조선사람들의 경우도 결코 례외로 될수 없었다.

일제의 군사적강점통치로 말미암아 모든것을 빼앗기고 일본 도꾜에 끌려간 조선사람들의 대부분은 사람못살곳에서 빈민굴을 형성하고 살았으며 군관련기업소나 군수공장, 군사시설공사장들에서 참혹한 노예로동을 하였다.

일본의 패망말기에 도꾜에는 10만명이상에 달하는 조선사람들이 있었던것으로 추산된다.

《조선은행경성총재조사과》가 1942년에 발표한 자료 《내지, 지나재주 반도인의 활동상황에 관한 조사》에 의하면 1941년말에 도꾜의 혼죠구와 후까가와구에 2만명, 아라까와구와 죠또구에 3만명에 달하는 조선사람들이 살고있었다고 한다.

도꾜의 혼죠구, 후까가와구, 죠또구 등에는 제강소와 조선소, 전기공장 등이 집중되여있었으며 바로 여기에 수많은 조선사람들이 끌려가 혹사당하였다.

1944년 5월 20일에 나이가이제강소주식회사 스나마찌공장장이 경시청에 《함경남도에서 온 반도로무자 37명중 4명이 발진티브스에 걸려 꼬마고메병원에 수용》하였다고 보고한 자료를 통해 당시 우리 나라 북부지역에서도 많은 청장년들이 이곳에 끌려와있었다는것을 알수 있다.

1995년에 발행된 일본도서 《도꾜의 조선거리》에는 《이시가와지마조선소에는 강제련행된 수많은 조선사람들이 일하고있었다. 1944년 10월과 11월에만 하여도 1,710명이 전라남북도에서 강제련행되였다.…》라고 기록되여있다.

도꾜에 강제련행된 조선사람들은 일제의 혹심한 민족차별정책에 의해 인간이하의 천대와 멸시를 받으며 위험하고 고된 로동을 강요당하였다.

이에 대하여 피해자 리창순(1925년 11월 22일생, 남자, 평양시 대동강구역 청류2동에서 살다가 2007년 8월에 사망)은 1942년에 도꾜의 시바우라제강소에 끌려갔다고 하면서 다음과 같이 증언하였다.

《이 제강소는 군함건조에 필요한 강철과 부속품을 생산하였는데 종업원은 2,000명정도였고 그중 조선사람은 500여명이였다. 제강소둘레에는 철조망이 쳐있었고 일본군대가 보초를 섰다. 하루에 12~14시간 일하는것은 보통이였고 때로는 밤을 꼬박 밝히며 일하는 날도 많았다.힘든 일은 모두 조선사람들이 하지 않으면 안되였다. 우리에게 주는 것이란 콩깨묵과 멀건 소금국에 절인무우 몇쪼박이였다. 우리가 평양에서 끌려갈 때에는 200여명이였는데 고향으로 돌아온것은 20명밖에 되지 않았으며 가지고온 유골은 3구뿐이였다.》

조선사람들은 일제의 특별한 감시와 통제를 받으면서 아무런 로동보호대책도 없는 고역장들에서 노예로동을 하였을뿐아니라 그 과정에 병들어 죽거나 사고로 죽고 매맞아 죽었으며 나중에는 미군의 공습으로 하여 무리죽음을 당하지 않으면 안되였다.

2.도꾜대공습에 의한 조선인강제련행피해자들의 참상

1945년 3월 10일 0시 8분 미군은 325대에 달하는 대형폭격기 《B-29》를 동원하여 도꾜에 대한 대대적인 공습을 하였다. 미군폭격기들은 저공비행으로 이 지역에 날아들어 소이탄을 비롯한 폭탄들을 미친듯이 퍼부었다.

불과 30분만에 도꾜의 35개 구역가운데서 29개 구역이 불길에 휩싸였다.

이 공습으로 하여 많은 조선사람들이 불에 타죽거나 일산화탄소중독과 산소의 급속한 감소로 질식되여 죽었으며 물에 빠져 죽고 심장마비로 죽는 대참사가 빚어지게 되였다.

이에 대하여 이시가와지마조선소에서 일한 에가와 데이지는 공습이 시작되자마자 자기 집으로 가던 길에 숙소로부터 도망쳐오는 조선사람의 한 집단과 만났다고 하면서 《그들은 3월 9일에 조선에서 온 사람들이였다.얼굴과 손은 화상이 심했고 옷도 다 해지고 한심하였다.숙소에는 900명정도가 있었는데 250~260명밖에 살아남지 않았다고 하였다.》고 증언하였다.

일본사람 야마다 쯔네는 피난처였던 어느 한 학교 강당에서 본 광경에 대하여 《온몸이 물집으로 퉁퉁 부어올라 다 죽어가는 사람들속에서 조선녀성이 울음을 터뜨리고있었다.<살려달라>고 부르짖던 녀성은 그 누구의 도움도 받지 못한채 주위의 사람들과 함께 숨을 거두었다.》고 하였다.

일본《도꾜공습을 기록하는 회》가 1973년에 출판한 도서 《도꾜대공습전재지》제1권에는 《피해는 주로 도꾜의 낮은 지대에 집중되였으며 특히 혼죠구, 후까가와구, 죠또구, 아사구사구의 4개구역은 거의다 전멸되다싶이 결정적인 피해를 입었다.》고 기록되여있다.

일본의 전쟁책임자료쎈터 기관지《전쟁책임연구》제53호에는 공습당시 조선사람들의 피해상황에 대하여 《도꾜재주조선인 9만 7,632명중 전재자는 4만 1,300명이다. 사망자는 이 가운데서 적어도 1만명을 훨씬 넘을것으로 보인다.》고 씌여져있다.

일제는 공습이 있은 후에 왜왕이 이 지역을 행각한다는것을 구실로 조선사람들을 비롯한 사망자들에 대한 신원조사조차 하지 않은채 67개소의 공원과 사원, 학교마당 등에 토장하였다가 다시 파내여 합장함으로써 억울하게 숨진 조선사람들의 유골마저도 제멋대로 마구 처리하는 반인륜적인 만행을 감행하였다.

제반 사실들은 도꾜대공습으로 수많은 조선사람들이 희생된것은 전적으로 구일본정부와 군부의 조선에 대한 군사적강점에 기인된것이라는것을 보여주고있다.

3. 일본의 태도와 립장

일본정부는 마땅히 조선인강제련행희생자들의 신원을 확인하고 유골을 사망직후에 인차 그들의 부모처자에게 보냈어야 하였으며 특히 일제의 패망과 함께 이 문제를 과거청산의 일환으로 철저히 해결했어야 하였다.

그러나 일본정부는 패망한지 60년이 넘도록 조선인강제련행희생자들의 유골을 모두 찾아 보낼 생각은 하지 않고 오히려 어떻게 하나 이 문제를 은페하면서 그에 대한 사죄와 배상을 회피해보려고 갖은 오그랑수를 쓰고있다.

일본에서는 흔히 후생로동성이 관리하고있는 유골들 즉 구일본군의 《군인》, 《군속》징발과 《우끼시마마루》폭침사건 등에 의하여 희생된 사람들의 유골만이 조선인유골문제의 대상인것처럼 간주되고있다.

조선인희생자들의 유골이라고 할때 그것은 일제의 군사적강점시기에 《모집》과 《관알선》, 《징용》, 《위안부》를 비롯한 여러가지 미명하에 일본과 그 강점지역들에 끌려가 목숨을 잃은 사람들과 일본에서 갖은 천대와 멸시속에서 고역살이를 하다가 간또대지진과 공습, 로동재해, 원자탄투하 등으로 희생된 모든 조선사람들의 유골을 말하는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본정부는 도꾜대공습에 의한 희생자들을 비롯한 모든 조선인희생자수를 극력 축소, 왜소화하려 하고있다.

현재 도꾜도위령당에 도꾜대공습의 수많은 희생자유골이 있다고 하지만 그중 이름이 확인된것은 4,000여명이며 조선사람이라고 볼수 있는 이름은 50명밖에 되지 않는다.

그런데 그 조선인희생자들의 유골마저도 대부분이 큰 단지에 합장되여있어 어느것이 누구의 뼈인지 분간할수 없으며 거기에 희생자의 이름이 씌여져있다고 하여도 그의 뼈가 확실한지 구분하기 어려운 형편에 있다.

이러한 조건에서 일본당국이 이미 발굴된 조선인희생자유골들에 대한 의학적감정을 실시하여 유골의 실태를 정확히 파악하며 유가족을 찾기 위한 조사를 진행하는것이 중요하다.

도꾜대공습으로 희생된 조선사람들의 경우 현재 일본당국과 도꾜도, 관련기업들에 당시의 《후생년금자료》, 《공탁금명부》, 《매장 및 화장인가증》, 《호적접수장》등이 보관되여있는 조건에서 먼저 그에 대한 조사를 심도있게 하여 정확한 사망자수를 자료와 함께 공개해야 한다.

그러나 일본당국은 조선인강제련행희생자유골문제해결을 요구하는 내외의 목소리가 높아지고있음에도 불구하고 이에 대한 결정적인 대책을 세우지 않고있다.

올해 1월 일본당국이 도꾜의 유텐지에 있는 1,100여명의 조선인강제련행희생자들의 유골가운데서 101구를 남조선측에 반환하였다고 하지만 대부분의 유골함에는 희생자의 뼈가 아니라 유물이나 손톱 등이 들어있었다.

더우기 엄중한것은 이와 관련한 추도식에서 일본 후생로동성 사회원호국 외사실장이란자는 일본의 침략전쟁기간에 태평양의 여러 섬에서 목숨을 잃은 조선인희생자들의 유골을 유가족들에게 넘겨주기 위해 일본에 가져왔다느니 1971년부터 유텐지에 정히 보관하여 제사를 지내왔다느니 뭐니하고 떠벌인것이다.

지난기간 일본당국은 조선인희생자들의 유골문제를 가지고 북과 남을 차별하면서 우리에게는 단 1구의 유골도 돌려보내지 않았을뿐아니라 심지어 공화국북반부출신희생자의 유골까지도 남측에 제멋대로 넘겨주는것과 같은 짓을 꺼리낌없이 감행하였다.

최근년간 일본당국은 조선인강제련행진상조사단을 비롯한 민간단체들이 조선인희생자유골과 관련한 자료와 명단들을 열람하거나 제공해줄것을 요청할때마다 《개인적인 문제》, 《실무적인 수속》 등을 구실로 그들의 정당한 요구를 받아들이지 않고있다.

그리고 도꾜의 유텐지에 내버려져있는 유골을 찾아 일본을 방문하려던 우리 나라 강제련행희생자유가족들과 관계자들의 입국을 거듭 가로막는 무례한 행위도 서슴지 않았다.

일본당국은 《야스구니진쟈》에 있는 명부에 억울하게 숨진 2만여명의 조선인강제련행피해자들과 일본의 극악한 수급전범자들의 이름을 함께 새겨넣고 과거침략사를 미화하며 전범자들을 찬양하는데 악용하고있다.

또한 조선인강제련행희생자들의 유골이 일본의 바다밑과 페갱들에 그대로 묻혀있고 각지 절간들에 내버려져있다는것을 뻔히 알면서도 아무런 대책도 취하지 않고있을뿐아니라 오히려 나고야시의 유물보관소에 있던 유골들을 신원확인과 유가족측에 대한 사전련락도 없이 망탕 처리해버리는것과 같은 비인도적행위를 공공연히 감행하였다.

일본당국의 이러한 그릇된 처사의 리면에는 어떻게 하나 조선인강제련행희생자들의 유골문제를 유야무야해치움으로써 저들의 범죄에 대한 증거물들을 없애버리고 나아가서 과거의 반인륜적범죄에 대한 배상의무를 털어버리려는 속심이 깔려있다.

이것은 사망자를 가능한 정중히 매장하고 그들의 묘를 존중하며 국적에 따라 구분하고 항상 분간할수 있도록 표시할데 대한 조항을 명기한 국제인도법과 시체, 유골 및 관에 있는 물건을 파괴, 파기하거나 훔친 자에게 형벌을 가할데 대한 조항을 쪼아박은 일본의 형법을 비롯한 국제법과 국내법에 위반되는 엄중한 인권침해죄로 된다.

유골마다에는 희생자들의 원한이 서려있고 애타게 기다리는 유가족들이 있다.

조선인강제련행희생자유골문제는 일제에 의해 억울하게 희생된 피해자들의 피맺힌 원한을 풀어주고 유가족들의 고통을 덜어주는데서 더 이상 미룰수 없는 인권문제로, 인도적문제로 나서고있다.

따라서 일본정부는 그 무슨 《랍치문제》, 《유골문제》, 《인권문제》같은것을 대고 반공화국, 반총련책동에 광분할것이 아니라 조선인강제련행 및 강제로동범죄와 희생자들의 유골문제와 관련한 진상을 공개하고 피해자들과 유가족들에게 철저히 사죄하며 배상하는 등의 실천적조치를 하루빨리 취해야 할것이다.

조선인강제련행피해자, 유가족협회는 앞으로도 전쟁을 반대하고 평화와 인권을 귀중히 여기는 세계 여러 나라 해당 단체들과 굳게 련대하여 일제가 감행한 몸서리치는 조선인학살만행에 대한 진상조사사업을 계속 심화시키며 응당한 대가를 받아내기 위한 투쟁을 더욱 힘있게 벌려나갈것이다.

조선인강제련행피해자, 유가족협회
주체97(2008)년 5월 24일
평양(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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