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양 7월 12일발 조선중앙통신)일본에 유괴되여갔던 조선녀성 도추지가 12일 평양고려호텔에서 기자들과 회견하였다.
기자회견에는 신문, 통신, 방송기자들과 외국특파기자들이 참가하였다.
기자회견에서는 먼저 도추지녀성이 발언하였다.
그는 일본에 강제로 끌려갔다가 두번 다시 사회주의조국의 품에 안긴데 대하여 말하면서 다음과 같이 계속하였다.
나는 1949년 10월 28일 일본 가나가와현 가와사끼시에서 아버지 도삼달과 어머니 이시까와 미요꼬의 딸로 태여나 1960년 부모를 따라 귀국선으로 조국의 품에 안겼다.
평안남도 북창군에서 살던 나는 《생활상방조를 준다》는 나쁜 사람들의 꾀임에 넘어 본의아니게 강제로 중국 심양주재 일본총령사관에 끌려갔다.
일본총령사관에서는 호적등본을 확인한 다음 조국으로 돌아가려는 본인의 의사는 무시하고 나를 일본으로 보냈다.
이렇게 되여 나는 인생의 곡절을 겪으면서 일본에서 3년 7개월이라는 세월을 보냈다. 그 기간은 나에게 있어서 참으로 고달픈 기나긴 세월이였다.
어디에서나 공화국에서 왔다는 한가지 리유로 하여 나를 경계하고 따돌리였다.
생존경쟁이 치렬한 일본땅에서 나같은 연약한 녀성이 단신으로 생계를 유지한다는것은 참으로 힘겨운 일이 아닐수 없었다.
보도에서 끔찍한 사건들을 접할 때마다 이런 사회에서 계속 살다가는 나에게도 언제 무슨 일이 생길지 모르며 더우기 자식들을 영영 보지 못할수도 있다는 공포로 하여 한시도 마음이 편안한 날이 없었다.
고독하고 암흑같은 생활속에서 매일같이 그리운것이 자식들이였고 어머니로서 그들과 생리별하여 이국땅에서 홀로 외로이 산다는것은 참으로 무서운 악몽과도 같은것이였다.
자식들과 전화나 편지를 할 때마다 그들에 대한 그리움은 더욱 사무쳤으며 다섯남매가 당의 품속에서 행복하게 살고있고 군사복무를 마친 둘째 사위가 당학교에서 공부하고있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하루빨리 조국으로 돌아가 그 장한 모습을 보지 않고서는 견딜수가 없었다.
날이 갈수록 죽더라도 기어이 조국으로 가야겠다는 결심이 더욱 굳어졌다.
그리하여 나는 조국의 품에 두번 다시 안기게 되였다.
이어 그는 기자들의 질문에 대답하였다.
민주조선사 기자; 일본으로 가게 된 경위를 보면 유괴랍치인데 그에 대하여 좀 더 구체적으로 설명해주기 바란다.
대답; 내가 조국을 떠난 때는 2003년 10월이였다.
그때 알지못하는 사람으로부터 전화로 함경북도로 오게 되면 일본에서 온 좋은 소식에 접하게 될것이라는 련락을 받았다.
나는 리기적인 생각으로 그에 순순히 응하여 북창을 떠났다.
정체모를 사람들이 내가 오기를 기다리고있다가 강건너편에 일본에서 온 친척이 있으니 가서 만나보자고 하여 그들의 꼬임에 따라 두만강을 건느게 되였다.
그러나 기다리고있은것은 나를 리용하여 돈벌이를 하려는 사람들이였다.
그들은 나를 확인하고나서 이미 대기시켜놓았던 차에 짐짝처럼 강제로 밀어넣고 어디론가 가는것이였다.
로상에서 그들은 나더러 차바닥에 엎드려있을것을 강요하였으며 일체 말을 하지못하게 하였다.
기차로 심양에 가니 역전에는 일본총령사관 차가 있었으며 일본총령사관에서는 총령사가 정문에 나와있었다.
그때에야 나는 비로소 그들이 나를 일본으로 데려가려 한다는것을 알게 되였다. 나는 조국으로 돌아가게 해줄것을 강하게 요구하였다.
그러나 일본총령사는 나에 대해 조사해보고나서 두 주일동안이나 빈방에 가두고 밖으로 나오지 못하게 하였다.
그후 그 자는 일본에 나의 호적이 그대로 있다느니, 친척들이 기다리고있다느니 하면서 나를 얼리는것이였다.
그에게 나는 공화국공민인것만큼 조국으로 돌려보내달라고 하였으나 막무가내였다.
이렇게 되여 나는 심양을 떠나 일본으로 가게 되였는데 하네다비행장에 도착하니 미우라 고다로라는 일본사람이 나를 맞이하였다.
후에 알게 된데 의하면 그는 재조일본인들과 일본에서 귀국한 조선사람들을 데려오는 비정부기구의 간판을 쓴 반공화국모략단체의 한 성원이였다.
결국 나는 일본의 반공화국모략단체의 희생물이 되였다.
조선중앙통신사 기자; 일본에서 생활하는 기간 느낀 소감에 대해 이야기해주었으면 한다.
대답; 일본에서 살면서 내가 느낀것은 한마디로 말하여 너무도 험악하다는것이다.
사람이라면 누구나 태를 묻고 자라난 고향이 있고 그에 대한 자기 나름의 추억을 가지고있다.
고향에 가보니 사람들이 얼음장같이 몹시 차거웠다.
제딴에는 고향이라고 찾아가 외롭고 고독한 마음을 달래려 하였으나 도저히 정이 들지 않았다.
사람들은 서로 담을 쌓고 살다보니 이웃에 누가 살고있는지조차 모르고있으며 또 알려고도 하지 않았다.
나의 생각이 허무하기 그지 없었다.
하루 이틀도 아니고 해와 달을 넘기며 감옥에 갇혀있는것같은 텅빈 방에있자니 앞으로 무슨 일이 생길지 몰라 무섬증이 온 마음을 사로잡았다.
더욱 두려운것은 아무도 없는 이 땅에서 그처럼 보고싶은 자식들을 만나지 못한채 죽으면 어쩌나 하는 생각이였다.
밤낮 듣기도, 보기도 끔찍한 사건들이 일어나는 일본땅에서 의탁할데가 없는 나로서는 조국으로 돌아가는 길밖에는 다른 출로가 없었다.
다음으로 내가 느낀것은 일본당국의 민족차별정책이 극심하다는것과 일본사회가 썩고 병든 부패한 사회라는것이다.
인정이 박한 일본땅에서 생활상 방조를 받을 곳도 없었고 오직 믿을데라고는 나의 작은 두손뿐이였다.
돈이 없으면 살수 없고 인격마저도 유지할수 없는 곳이 일본이다.
나는 빨래집에서 일도 하고 목걸이나 귀걸이를 만들어 팔기도 하면서 생계를 유지하였다.
일본에서 돈많은 자들은 개와 고양이에게 옷을 해입히고 신발까지 신기고있으며 상점들에서는 돈없는 사람들이 먹어볼수도 없는 음식들을 개음식으로 팔고있다. 정말 개같은 세상으로밖에 달리 말할수 없다.
일본에서 생활하면서 내가 절감한것은 태를 묻고나서 자란 곳이 고향이나 조국인것이 아니라 인간의 운명과 미래를 다 맡아 보살펴주는 곳이 바로 진정한 삶의 품이고 조국이라는것이다.
《평양타임스》 기자; 최근 일본반동들의 반공화국,반총련책동이 더욱 악랄하게 감행되고있는데 일본에 있으면서 그에 대해 목격하였거나 느낀것이 있으면 말해주었으면 한다.
대답; 지금 일본에서는 《랍치문제》, 《인권문제》 등에 대해 떠들면서 우리 공화국을 비방중상하고 총련을 모해하는 소동이 벌어지고있다.
일본당국자들은 총련 시설들과 주택 심지어 신성한 교정에까지 경찰을 투입하여 강제수색을 벌리고있다.
《만경봉-92》호의 배길이 차단되여 재일동포들이 조국에 한번 오려고 해도 비행기로 멀리 에돌아오지 않으면 안되게 되였다.
문제로 되는것은 어중이떠중이들이 모인 반공화국단체들이 우리 공화국에 대한 온갖 허위선전을 하고있는것이다.
이자들은 나까지도 리용하려고 하면서 무슨 《기자회견》이요, 《집회》요 하는데 참가할것을 요구하였는가 하면 부모와 자식간의 혈육의 정까지도 저들의 정치적목적에 리용하려고 하였다.
제집건사도 제대로 하지 못하면서 남의 집일에 간참하기 좋아하는것이 일본의 체질화된 습성인것 같다.
조선중앙방송위원회 기자; 위대한 김정일장군님의 품, 조국의 품으로 다시 돌아오게 된 동기에 대하여 설명해주기 바란다.
대답; 나는 본의아니게 일본에 가서 생활하는 기간 고향에도 가보았고 여러 사람들도 만나보았다.
이 과정에 더해만 지는것은 조국에 두고온 자식들에 대한 그리움과 지난 기간 어렵고 힘들 때마다 서로 돕고 이끌어주던 사람들의 뜨거운 정이였다.
고독하고 외로운 생활속에서 밤마다 잠자리에 들면 지나온 즐겁고 행복했던 생활들이 아름다운 추억으로 되살아났다.
자식들과 전화나 편지를 주고 받을 때면 눈물이 흐르지 않은적이 없었고 한시도 그애들 생각이 머리에서 떠나지 않았다.
어머니가 없으면 그애들이 살아갈것 같지 못하다고 생각했는데 오히려 내가 있을 때보다 아이들은 더 잘 자라고 행복하게 살고있었다.
이러한 소식들을 들을 때마다 그들을 보고싶은 생각이 간절하였고 하루빨리 조국으로 돌아갈 마음이 앞섰다.
로동신문사 기자; 그립던 위대한 장군님의 품에 다시 안겨 자식들을 만나보았는데 조국에 돌아온 소감에 대하여 이야기해주었으면 한다.
대답; 그렇게도 오고싶었고 기어이 찾아가리라 결심했던 조국에 도착하였을 때 나의 심정을 실로 무엇이라 표현하겠는지 모르겠다.
비행장에 마중나온 자식들을 만나는 순간 꿈인지 생시인지 갈피를 잡을수 없었다.
만나는 모든 사람들이 나를 따뜻이 반겨주고 친절하게 대해주니 송구스럽기만하다.
기자회견을 마치면서 그는 고마운 조국에서 즐겨부르고 일본에서도 외로울 때마다 마음속으로 불러보던 노래 《장군님 식솔》을 격정에 넘쳐 불렀으며 위대한 수령 김일성동지의 초상화와 위대한 령도자 김정일동지의 초상화를 우러러 삼가 인사를 드리였다.(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