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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미동포인터네트신문의 글 《김일성주석의 생애가 나에게 준 영향》
(평양 4월 20일발 조선중앙통신)태양절에 즈음하여 재미동포인터네트신문 《민족통신》이 《김일성주석의 생애가 나에게 준 영향》이라는 제목으로 된 이 신문 시카고지역 편집위원 김원유의 글을 실었다.

필자는 글에서 자기의 마음속에 새겨진 몇가지 사실을 가지고 위대한 김일성주석의 생애가 자신에게 준 영향에 대해 이야기하려 한다고 하면서 다음과 같이 썼다.

나는 2001년 7월 평양을 방문하여 북에 송환된 비전향장기수들을 만났다. 그리고 그중 한 비전향장기수로부터 충격적인 증언을 들었다.

《팔다리는 칠성판에 꽁꽁 묶이우고 머리는 옆으로 돌리지 못하게 고정된다. 페속으로 들어간 고추가루물은 가슴을 찢으며 기침을 일으키지만 다시 채워진 주전자의 물은 인정사정 두지 않고 다시 몸속으로 차들어온다. 배속에 채워졌던 물이 입으로 분수처럼 뿜어져나오길 몇번째, 몸은 완전히 기력을 잃고 혼수상태가 된다. 정신을 다시 차리는데는 상당한 시간이 흘러야 한다. 정신이 들자 몸을 추스르며 옷깃을 여미고 북녘하늘을 우러러 심호흡을 하며 웨친다. <나는 오늘도 목숨을 건 전투에서 당당히 승리했습니다. 휘몰아치는 적들의 전향공작을 이겨낸 이 승리를 수령님께 보고드립니다. 저는 이 승리의 기쁨을 수령님과 함께 나누고 싶습니다.>》

그 비전향장기수는 인간이 견딜수 있는 한계를 넘어서는 그 무지막지한 전향공작을 어떻게 이겨낼수 있었을가?

살인적인 육체적 고문을 포함한 로모와 형제자매를 동원한 정신적고문은 보통 인간으로서는 견디기 힘든 고통이다.

만약 고생을 모르고 좋은 가정환경에서 자랐다면 그 고통은 더 견디기 힘들었을것이다.

그는 인민대중과 함께 계시는 수령을 마음속 깊이 간직하고있었던것이다.

그렇기에 삶과 죽음의 경계선에서 저승을 경험하고 정신을 차리자마자 옷깃을 여미고 자세를 바로하고 수령께 례의를 갖추었을것이다.

그는 김일성주석을 생각하면 절로 힘이 나서 어떠한 어려움도 이겨낼수 있는 용기가 샘솟는다고 했다.

그는 비록 생사를 가르는 고통을 겪고있었지만 수령을 숭앙하고있었기에 그의 마음은 평화롭게 승화되여 있었던것이 아니였을가?

한 인간이 마음속으로 숭앙해온 수령의 영상과 그가 처절하게 투쟁한 모습은 내 마음속에 새롭게 새겨져 6년 세월이 흐른 지금에도 선명하게 떠오른다.

10여년전 《한국》의 한 통일운동단체 상임의장이 시카고에 있는 꾸바민족문화회관을 방문했을 때 나도 그와 동행을 한적이 있다. 그곳에서 안내하는 사람이 《코리아에서 누구를 제일 신뢰하느냐》라는 질문을 했다.

내가 신뢰하는 사람이 누구일가 하고 잠시 머뭇거리고있는데 상임의장은 서슴없이 김일성주석이라고 대답했다.

제일 신뢰하는 분이 김일성주석이라고 해도 남에서 온 사람이라면 달리 말했을것 같은데 그는 서슴없이 말하는것이였다. 당시로서는 상당한 파격이 아닐수 없었다.

그는 이미 김일성주석을 력사속에서 잘 알고있는것이 틀림없었다.

나의 마음에는 충격이 일었고 그 파장은 오늘까지 이어지고있다.

비전향장기수가 그렇게도 흠모하고 신뢰한 김일성주석은 다름아닌 김성주분이시였다.

1937년 일제의 수탈이 극심해 우리 민족이 기아와 도탄에 빠져있을 때 《한국》의 어용학자들은 보천보전투를 통해 《민족의 태양》으로 칭송을 받으신 김일성장군은 김성주와는 다른 인물이라고 주장하지 않았던가?

그들은 보천보전투때의 김일성장군은 《혜성처럼 나타나 도탄속에 빠져있는 우리 민족에게 용기와 희망을 주신 분, <민족의 태양>이라는 호칭이 조금도 손색이 없으신 분》이라고 했다.

결국 어용학자들의 기록을 통해 김일성장군께서 《민족의 태양》으로 칭송을 받으시였다는 사실이 증명된 셈이다.

또 일제시기 《총독부》동향보고서에는 《한만국경에 사는 사람들이 사내아이가 태여나면 <김일성장군처럼 자라라>하고 빌었다》는 기록도 있다.

김일성주석께서는 해방후 북에 정치적안정을 마련하시였으며 일제로부터 착취 당하며 살아온 인민들의 한을 풀어주시였다.

연필공장에 대한 일화는 너무도 유명하다.

해방후 북에서는 연필을 생산하려고 하였지만 그를 위한 공장시설이 제대로 갖추어져있지 못했다. 그때 수공업적으로 연필을 생산하는 조그마한 공장이 있다는 사실을 아신 김일성주석께서와 김정숙동지께서 못내 기뻐하시였다는 이야기는 지금도 북에서 전설처럼 전해진다.

1992년부터 김일성주석의 회고록 《세기와 더불어》가 출판되기 시작하였다.

회고록을 보면 주석께서 얼마나 현실을 정확히 보시고 선견지명하게 일을 처리하시였는지 잘 알수 있다.

나는 만경대고향집을 방문하여 강사로부터 고향집에 대한 여러 일화와 주석께서 14살 어리신 나이에 김형직선생의 좌우명,뜻을 원대하게 가져야 한다는 《지원》의 사상을 가슴에 안고 조선을 독립시킬 맹세를 다지시며 사립문을 나서시였다는 해설을 듣고 가슴이 찡했다.

아무나 가질수 있는 결심이 아니기때문이다.

김일성주석의 가정은 가난했지만 혁명정신이 용솟음치는 그런 삶들을 보면 그분께서 어떤 가정환경에서 성장하시였는지 잘 알수 있다.

할아버지 김보현선생은 《돈이 없이는 살수 있어도 인덕이 없으면 살수 없느니라.》고 자식들에게 늘 훈계를 하시였다.

이것은 곧 김일성주석의 가정철학이기도 하다.

《지원》을 좌우명으로 삼으신 아버님이신 김형직선생께서는 어리신 아드님에게 사람이 왜 큰 뜻을 가져야 하는가에 대하여 많은 이야기를 들려주시였다 한다.

그리고 선생께서는 내가 싸우다 쓰러지면 아들이 하고 아들이 싸우다 못하면 손자가 싸워서라도 우리는 반드시 나라의 독립을 성취하여야 한다는 강한 의지를 지니시였다.

삼촌이신 김형권선생은 마포형무소에서 감옥살이를 하시다 모진 고문 끝에 옥사하시였는데 그때 집에는 돈이 없어서 시신을 찾아가라는 통지를 받고도 찾아오지 못하였다고 한다.

또 동생이신 김철주선생은 유격대에 들어가 총을 잡고 싸우다 전사하시였다.

김일성주석께서는 할아버지와 할머니에 대해 이야기하실 때에는 그분들의 견결한 혁명정신에 대해 탄복하시였다 한다.

주석의 일가분들이 나라의 독립을 위해 만경대고향집을 나서시였지만 살아서 돌아오신 분은 김일성주석 혼자뿐이시였다.

강반석녀사와 김일성주석의 일화를 보면 어떠한 가정교육을 받으시였는가에 대해 엿볼수 있다.

김일성주석께서는 유격활동에 들어 가시기전 어머님께서 계시는 안도 소사하 토기점골에 자주 들리시여 어머니의 살림을 돌봐드리고 약재도 구해드리군 하시였다.

그러나 강반석녀사께서는 그렇게 효도하는 김일성주석을 앉혀놓으시고 《네가 혁명을 하려거든 혁명에 전심하고 세간살이를 하려거든 세간살이에 전심하고 량자간에 어느 하나를 택하거라.》고 타이르시였다 한다.

그리고 강반석녀사의 이런 타이름은 후에 또 한번 나온다.

어느 날 철주동생이 찾아와 어머니의 병환이 위독한 지경에 이르렀다는 말을 전해주신다.

주석께서는 동지들이 모아준 돈으로 좁쌀 한말을 사서 등에 지고 토기점골로 어머니를 찾아가신다.

주석께서는 오래간만에 어머니와 동생들과 밥상에 둘러앉아 막내동생이 잡아서 형에게 대접하려고 말려 놓은 버들치를 구워드시며 세상 돌아가는 이야기며 주변 사람들이 사는 이야기 등을 나누기도 하시고 철주동생과 산에 가서 땔나무도 해오고 이틀동안 오붓한 시간을 보내시였다.

어머니는 돌아가려는 김일성주석께 남자의 주머니에는 정 급할 때 쓸 돈이 있어야 한다고 하시며 돈 20원을 쥐여주신다. 그 돈 20원을 받아드신 주석께서는 도무지 발길을 앞으로 내딛지 못하고 집둘레를 도시였다.

한바퀴를 돌고 두바퀴를 돌고 세바퀴를 도시는데… 내가 이 마당에 다시 들어서게 되는 날은 언제쯤 될가? 과연 내가 지금 승산이 내다보이는 길을 가려고 하는가? 내가 가는 앞길에는 무엇이 기다리고있을것인가? 그사이 어머니의 병이 호전될 가망은 있을가?

김일성주석께서 이런 생각에 잠겨 집둘레를 속절없이 돌고있을 때 어머니께서 방문을 열어제끼시며 준렬히 꾸짖으시였다.

《상기두 무엇이 걱정돼서 그렇게 떠나지 못하구 우물쭈물하느냐? 나라를 찾겠다구 결심품구 나선 사람이 그렇게도 마음이 예리고 집걱정이 많아서야 어떻게 대사를 치르겠니… 네가 장차로도 이 에미걱정때문에 집으로 찾아올 생각이라면 아예 이 문앞에 얼씬도 하지 말아라. 나는 그런 아들은 만나지 않겠다.》

그것은 김일성주석께서 보신 어머니의 마지막 모습이시였다.

나는 이 대목을 읽으며 책갈피에 눈물을 떨어뜨리고 말았다.

과연 김일성주석의 위대함이 어디에 원천을 두고있는지 대단한 발견을 한것 같았다.

비전향장기수의 가슴속에 모셔진 김일성주석과 《한국》의 한 통일운동단체 인사가 신뢰해온 주석 그리고 회고록에 나오는 여러 일화들을 통해 나의 마음속에 새겨진 김일성주석은 시간이 지남에 따라 하나의 영상으로 합쳐졌다.

언제부터인가 내가 어려움에 처해지거나 어떻게 해야 할지 갈피를 잡지 못할 때마다 김일성주석의 생애에 대해 자주 되새기는 습관이 생겼다.

특히 김일성주석께서 《<이민위천>, 인민을 하늘같이 여긴다는 이것이 나의 지론이고 좌우명이였다. 인민대중을 혁명과 건설의 주인으로 믿고 그 힘에 의거할데 대한 주체의 원리야말로 내가 가장 숭상하는 정치적신앙이며 바로 이것이 나로 하여금 한생을 인민을 위하여 바치게 한 생활의 본령이였다.》라고 하신 대목은 늘 나의 뇌리에 머무르고있다.(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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