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양 11월 23일발 조선중앙통신)23일부 《로동신문》은 《<판문점통일실록>에 새겨진 불멸의 자욱》이라는 제목으로 된 적십자 판문점련락대표부 북측 련락대표 안명철의 글을 실었다.
그 전문은 다음과 같다.
위대한 령도자 김정일동지께서는 다음과 같이 지적하시였다.
《위대한 수령 김일성동지께서 개척하시고 이끌어오신 조국통일위업을 계승하여 우리 대에 기어이 조국을 통일하려는것은 우리 당의 확고한 결심이며 우리 인민의 혁명적의지이다.》
북과 남,해외의 온 겨레가 힘을 합쳐 6.15자주통일시대를 떠밀어나가고있는 시기에 우리 인민은 위대한 령도자 김정일동지의 력사적인 판문점시찰 10년이 되는 날을 뜻깊게 맞이하게 된다.
주체85(1996)년 11월 24일 경애하는 장군님의 판문점시찰은 조미대결전에서 기어이 승리자의 영예를 떨치고 우리 공화국의 존엄을 수호하시려는 백두산선군령장의 철의 신념의 분출이였고 어버이수령님의 조국통일유훈을 빛나게 실현하시려는 위대한 장군님의 혁명적의지의 발현이였다.
경애하는 장군님께서 판문점을 시찰하신 때로부터 어언 10년, 이 10년동안에 조국통일운동사에는 얼마나 많은 경이적인 사변들이 기록되였는가.
우리 적십자 판문점련락대표부 성원들은 그 직접적인 목격자,체험자로서 《판문점통일실록》의 갈피갈피에 새겨진 력사적인 사변들을 다시한번 세상에 전하고싶은 마음에서 붓을 들었다.
혈육의 정 넘치는 뜨거운 사랑
지금으로부터 10년전, 경애하는 장군님께서 판문점으로 향하신것은 새벽 4시경이였다고 한다.
소설절기를 낀 찬 날씨의 이른새벽이여서 차창에는 하얗게 성에가 불리였다.
그 전날 온 하루 어느 한 인민군부대를 현지시찰하시느라 쌓인 피로로 잠시 쪽잠에 드셨던 경애하는 장군님께서는 어느결에 차창가까이로 다가오는 개성시를 감촉하시고 차를 멈추게 하시였다.
동행한 일군들이 차를 멈추게 하신 사연을 몰라 그이를 우러르며 머뭇거리고있을 때 어버이장군님께서는 우리 여기서 잠시 기다렸다가 가자고,지금 군인들이 한창 새벽굳잠에 들었을텐데 우리가 온것을 알면 잠을 설칠수 있으니 그들이 기상하여 아침식사를 한 다음에 판문점에 들어서자고 말씀하시였다.
백두산선군령장의 판문점시찰의 길은 이렇듯 초병들에 대한 열렬한 사랑으로 시작되였다.
판문점초병들에 대한 경애하는 장군님의 사랑은 판문점시찰때에는 물론이고 그후에 더욱 뜨겁게 미치였다.
경애하는 장군님께서는 최전연초소의 초긴장상태에서 군무생활을 하고있는 그들의 수고를 헤아리시여 가족들과 함께 수도 평양에 올라와 휴식하도록 크나큰 은정을 베풀어주시였다. 어버이장군님의 육친적사랑에 군인들과 가족들은 뜨거운 눈물을 흘리였다.
경애하는 장군님의 사랑은 경무관들의 손목에 채워진 금시계에도, 군무생활과 가정생활의 구석구석에도 어려있다. 우리 경무관들의 손목에서 번쩍이는 금시계를 본 적측의 한 성원은 《이런 값진 금시계는 서방의 백만장자들도 몇번 재보고야 산다. 그런 최고급금시계를 선사하신것을 보면 당신들이 최고사령관의 안중에 있다는것을 쉽게 알수 있다.
김정일최고사령관의 부하로 근무하는 당신들이 정말 부럽다.》라고 말하며 부러움을 금치 못해하였다.
경애하는 장군님께서는 우리 적십자 판문점련락대표부 성원들에게도 크나큰 사랑을 베풀어주시였다.
정녕 경애하는 장군님의 판문점현지시찰은 《판문점통일실록》에 사랑의 전설로 새겨져 오늘도 만사람의 심장을 뜨겁게 울려주고있다.
겨레의 통일념원을 받들어올린 탑
평양을 떠나 개성으로 내려 올 때마다 우리들은 의례히 지나군 하는 조국통일3대헌장기념탑을 남다른 격정속에 바라보군 한다.
통일에 대한 민족의 요구와 시대의 지향을 담고있는 조국통일3대헌장기념탑에도 판문점과 잇닿은 경애하는 장군님의 거룩한 통일령도의 자욱이 아로새겨져있다.
10년전 11월 24일 판문점을 찾으신 경애하는 장군님께서는 어버이수령님의 존함이 새겨진 친필비앞에서 오래도록 걸음을 멈추시고 통일의 길에 바쳐오신 수령님의 로고를 뜨겁게 회고하시였다.
경애하는 장군님께서는 위대한 수령님께서 내놓으신 조국통일3대원칙과 고려민주련방공화국창립방안,전민족대단결10대강령은 조국통일의 3대기둥,3대헌장으로 된다고 말씀하시였다.
조국통일3대기둥,3대헌장의 정립은 우리 겨레의 심장에 통일조국을 받들어올리는 억척같은 기둥을 세우고 자주통일의 앞길에 휘황한 기치를 펼치시려는 경애하는 장군님의 웅지의 발현이였다.
그 이후 경애하는 장군님께서는 평양의 통일거리입구에 우리 인민의 통일념원을 담고있는 조국통일3대헌장기념탑을 세우도록 몸소 발기하시고 정력적으로 지도하시여 완성시켜주시였다.
세계에 기념비적이라고 일컬으는 탑은 많지만 위인의 거룩한 손길에 이끌려 민족통일과 부강번영에 대한 겨레의 지향과 시대의 요구를 반영하여 대걸작으로 솟아오른 탑을 꼽는다면 조국통일3대헌장기념탑을 꼽아야 할것이다.
이 기념탑을 참관한 남녘동포들이 민족의 통일념원을 가장 절절하게 반영한 통일탑이라고,우리 민족의 위대함을 더욱 깊이 느끼게 된다고 격찬하고있는 현실이 그에 대한 례증으로 되고있다.
판문점과 이어진 평양상봉길
력사적인 평양상봉과 6.15북남공동선언은 어버이수령님의 조국통일위업의 위대한 계승자이신 경애하는 장군님께서 구상하시고 터쳐올리신 경이적인 사변이다.
7.4공동성명에서 천명된 조국통일3대원칙을 다시금 확인하고 주체89(2000)년 6월에 력사적인 평양상봉과 북남최고위급회담을 진행할것을 온 겨레앞에 확약한 4.8북남합의서의 발표는 민족사적사변의 도래를 예고한 첫포성이였다.
4.8북남합의서에 따라 판문점에서는 온 겨레와 세계사회계의 비상한 관심속에 4월말부터 근 한달동안에 력사적인 평양상봉과 북남최고위급회담준비를 위한 5차례의 준비접촉을 비롯하여 여러갈래의 실무접촉들이 련이어 진행되였다.
긴장감만 떠돌던 적막한 판문점에 사람들과 차량들이 붐비고 전화기가 만가동으로 울어대는 전례없이 분주한 분위기가 조성되였다.
남측 선발대성원들이 꼬리를 물고 판문점분리선을 넘나들었다.
력사적인 평양상봉과정을 통하여 우리들은 4년전 판문점에 오시여 분렬의 상징인 판문점을 통일의 상징으로 전환시키실 확고한 의지를 표명하신 경애하는 장군님의 높으신 뜻이 빛나게 실현되는 벅찬 현실을 그대로 체험하였다.
세계사적인 사변의 기록
주체89(2000)년 9월 2일 아침, 서울을 출발한 63명의 비전향장기수들이 판문점 남측 지역에 도착하였다. 오전 10시, 온 세계의 이목이 집중된 가운데 그들이 판문점분리선을 넘어서기 시작했다.
30년 지어 40년이상 옥살이에 시달려 죽음의 문어구에 섰던 그들을 어머니조국은 얼싸안았다. 하늘땅을 진감하는 《만세!》의 환호소리와 뜨거운 혈육의 정이 싸늘하게 식어가던 그들의 심장에 불을 달아주었다.
백발을 얹은 그들의 얼굴에 한껏 미소가 어리였다. 순결하고 아름다운 그 미소에 신념과 지조를 끝까지 지켜낸 혁명가의 존엄이 있었고 몇천몇만번의 생을 다시 산다고 해도 비길수 없는 인간의 가장 고상한 삶과 끝없는 행복이 비껴있었다.
한없이 은혜로운 경애하는 장군님의 품,어머니조국의 품에 안겨 인간의 향기를 한껏 터치는 통일애국투사들, 이 세상 그 어디에서도 찾아볼수 없는 혁명가의 아름다운 모습을 되찾은 그들을 《판문점통일실록》은 자기 갈피에 깊이깊이 새겨넣었다.
조선정전협정이 조인된이래 지금까지 판문점은 쌍방간의 인도주의문제협상의 유일한 통로로 되여왔다.
하지만 60여명이나 되는 신념의 승리자들이 집단적으로 귀환되는것과 같은 충격적인 사변은 일찌기 없었다. 그것은 숭고한 동지애의 체현자이신 경애하는 장군님께서만이 성사시킬수 있는 력사의 기적이다. 우리들은 비전향장기수들의 조국귀환과 관련한 실무처리를 하면서 동지애의 화신이신 경애하는 장군님을 모신 긍지와 자부심을 가슴터지게 절감하였다.
오늘 통일애국투사 비전향장기수들이 누리는 공화국영웅,조국통일상수상자의 값높은 삶은 바로 10년전 경애하는 장군님의 판문점시찰길과 잇닿아있는것이 아니겠는가.
하늘에 닿은 승리자의 기개
지난 10월 24일 저녁 7시 우리들은 판문점분리선을 넘어서는 서해 부포바다가양식사업소의 기관선 《ㅁ-소-2632》호 기관장 정문언동무를 맞아들였다.
뜻하지 않게 표류되여 남조선에 35시간 억류되였던 그가 백두산선군령장을 높이 모신 혁명전사의 존엄과 기개를 당당하게 떨치고 돌아온것이다.
《경애하는 장군님, 저는 승리하고 기어이 장군님의 품으로 돌아왔습니다.》
격정을 터치는 그의 얼굴에서는 뜨거운것이 하염없이 흐르고있었다. 그것은 단순한 눈물이 아니였다.
신념을 지켜 하루반동안 싸운 불굴의 인간이 자기에게 승리의 기둥을 세워준 위대한 은인이신 어버이장군님께 드리는 감사의 인사였다.
어찌 그 한사람뿐이겠는가.
조선인민경비대 대원 정광선동무도, 김철진,김경철동무들도 그렇게 돌아왔다.
백두산선군령장의 혁명적의리와 숭고한 동지적사랑에 떠받들려 판문점에서는 사회주의냐,자본주의냐 하는 신념의 대결에서 승리하고 돌아오는 군복입은 병사도,평범한 로동자도 맞이하는 격동적인 화폭들이 펼쳐지군 한다.
판문점의 푸른 하늘가에 높이 울리는 《만세!》의 웨침은 그대로 승리자의 기개이다.
옹근짜리대회-전민족적인 통일축전
판문점이라고 할 때 먼저 떠오르는것은 《가자 북으로, 오라 남으로, 만나자 판문점에서!》라고 웨치던 1960년대 남녘청년학생들의 피의 절규이다. 통일을 바라는 북과 남의 간절한 소망은 분렬의 년륜과 함께 판문점에 깊이 새겨졌지만 오랜 세월 북과 남,해외가 한자리에 모여앉는 전민족적인 통일축전이 펼쳐진적은 없었다.
그 아쉬움을 메우며 주체88(1999)년 8월 15일 판문점에서는 범민족통일대축전의 일환으로 《민족의 자주와 대단결을 위한 3자련합대회》가 성황리에 진행되였다.
어버이수령님께서는 생전에 늘 북과 해외만 모여서 하는 범민족대회는 절반짜리 대회라고, 북과 남,해외가 다 모여서 해야 온전한 범민족대회라고 할수 있다고 하시면서 어떻게 하나 남측 대표가 참가하는 3자련대를 실현해야 한다고 강조하시였다. 그런 의미에서 제10차 범민족대회는 남측의 기본통일운동단체들인 범민련 남측본부와 《전국련합》,《한총련》의 대표들 그리고 《민주로총》대표가 참가한 범민련운동사상 처음으로 되는 북과 남,해외의 첫 3자회합이였으며 전민족적인 통일대축전이였다.
참가자들은 조국통일3대헌장을 통일운동의 기본정치로선으로 확인하고 그것을 철저히 관철해나가며 통일애국력량의 련대련합과 민족대단결로 부강번영하는 련방제통일국가를 일떠세우기 위하여 힘차게 싸워나갈것을 다짐하였다.
판문점의 하늘가에 대형통일기가 세차게 휘날렸고 북과 남,해외동포들이 합창으로 터친 《민족대단결가》의 우렁찬 노래소리는 북남삼천리로 힘있게 메아리쳐갔다.
《과시 장군이시다》
주체87(1998)년 6월 남조선의 《현대그룹》 명예회장 정주영이 판문점을 넘어섰다.
강원도 통천태생인 정주영이 자기 회사산하에서 품을 들여 기른 소들을 끌고 판문점을 넘어온데는 어버이장군님의 대해같은 은덕에 대한 답례의 표시와 함께 북과의 경제협력사업을 끝까지 내밀려는 내심도 있었다.
한생을 자본의 축적과 기업의 확대,치부에 바쳤다고 할수 있는 그가 때늦게나마 조국과 민족을 위해 그 무엇인가 이바지하려는 결심을 한것이였다.
정주영이 두번째로 판문점을 넘어선것은 그해 10월이였다.그의 남다른 향토애와 민족적량심을 소중히 여기신 위대한 장군님께서는 10월 30일 정주영과 그 가족일행을 접견해주시는 뜨거운 은정을 베풀어주시였다.
정주영의 건강을 념려하시여 비행기로가 아니라 판문점륙로를 통해 들어오도록 하시고 몸소 숙소에까지 찾아오시여 동포애의 정을 주신 어버이장군님이시다. 나이많은분이라고 하시며 그를 가운데 세우고 기념사진을 찍으신 그토록 다심하고 인정많으신분, 금강산관광의 길도 열어주시여 민족의 명산을 한번만이라도 보았으면 하던 남녘동포들의 소원을 풀어주신 위대한 장군님의 고매한 덕망과 숭고한 동포애에 정주영은 가슴뜨거움을 금할수 없었다.
판문점을 넘어 남쪽땅으로 돌아간 정주영은 기자들에게 김정일장군은 지금까지 자기가 만나본 위인들중에서 첫 손가락에 꼽히는 위인이시고 장군중의 장군이시라고 심중을 터놓았다. 어찌하여 북의 령도자를 공식석상에서 장군으로 호칭하는가고 반문하는 기자들에게 정주영은 《과시 장군이시기때문에 장군으로 부른다》고 거침없이 대답하였다.
그는 자기의 지성이 담긴 최고급대형승용차를 경애하는 장군님께 삼가 올리였다.우리는 판문점을 넘어 평양으로 향하는 승용차를 보면서 경애하는 장군님을 열렬히 흠모하는 한 기업가뿐이 아닌 온 남녘의 민심을 읽었다.
민족경제협력의 상징
지난날 아래웃집으로 오붓하게 모여앉았던 514개의 부락이 종적없이 사라지고 122개의 마을과 8개의 군이 북과 남으로 갈라진 원한의 땅, 북과 남을 잇던 세줄기의 넓은 도로와 동서 두갈래의 철길을 동강내면서 6백여리에 가로지른 군사분계선, 그 량옆에 촘촘히 묻은 지뢰와 철조망에 막혀 사람은 물론 짐승들마저 넘나들기 어렵던 이곳 판문땅에 드디여 통쾌한 시각이 왔다.
주체92(2003)년 6월 14일 11시 무성한 잡초를 걷어내고 녹쓴 레루를 들어내며 끊어진 땅길을 련결하는 의식이 군사분계선상에서 진행되였다. 민족의 혈맥과 지맥을 이어놓는 력사의 순간이였다.
그로부터 보름후 분렬의 아픔을 포개안고 잠자던 판문땅을 흔들어 깨우는 요란한 발파소리와 함께 북남경제협력의 상징 개성공업지구를 건설하는 가슴벅찬 착공식도 펼쳐졌다.
외세의 방해책동으로 건설이 중단되여 콩크리트더미로 변한 금호지구의 경수로와는 달리 북과 남의 우리 민족이 힘을 합쳐 열어제끼는 경제협력의 새로운 장이 《판문점통일실록》에 록화되는 환희로운 장면이였다. 여론들은 《분단의 철조망과 지뢰밭을 뚫고 통일의 길을 열어놓는 력사적인 쾌거》,《대립과 갈등,분단의 세기를 극복하고 화해와 협력,통일의 시대를 여는 장쾌한 려명》이라고 평하였다.
철거된 대결시대의 유물
몇년전까지만 해도 6백여리 군사분계선상에서는 총과 총, 불과 불의 물리적대결뿐아니라 서로의 사상과 제도를 비방중상하는 격렬한 선전심리적대결도 첨예하게 지속되여왔다.
분계연선의 높은 고지들에 설치된 초대형전광판과 각종 규격의 구호판들, 수많은 고출력방송기재들이 주야로 동작하면서 상대방을 심히 자극하였다.
그러하였던 군사분계선상에서 6.15공동선언채택이후 북남군사당국사이에 진행된 회담에서 지난 수십년간 지속되여온 상대방에 대한 비방중상을 전면 금지하며 그 수단들을 철거할데 대한 합의서가 채택되게 됨으로써 각종 비방선전수단들이 철거되게 되였다.
분리선을 넘은 통일모녀
6.15가 열어놓은 우리 민족끼리시대에는 분렬 반세기동안에는 상상할수 없었던 희한한 일들이 자주 일어나 겨레의 마음을 기쁘게 해주었다. 주체94(2005)년 10월 25일 낮 12시 민족분렬사상 처음으로 남녘의 한 녀인이 북에서 낳은 옥동녀를 안고 판문점분리선을 넘어갔다. 뜻깊은 10월 10일 저녁에 평양의 5월1일경기장에서 대집단체조와 예술공연 《아리랑》공연을 관람하던 남측 통일련대 대변인 황선녀성이 평양산원으로 실려가 밤 10시에 딸을 낳았던것이다.
황선으로 말하면 1998년 《한총련》대표로 사선을 헤치고 평양에 와서 범민족대회에 참가하고 판문점분리선을 넘는 그 길로 체포되여 3년 6개월동안 감옥생활을 하였었다.
황선녀성이 평양산원에서 옥동녀를 낳았다는 소식은 삽시에 수도는 물론 나라의 방방곡곡에 번져갔다. 매일 축하편지와 전보,전화들이 산원으로 날아들었고 꿀이며 애기옷과 포단 등 정성어린 물품들을 가지고 병원을 찾는 사람들의 발길이 끊길줄 몰랐다.
황선녀성이 건강을 회복하고 딸 윤겨레를 안고 비행기로 가려 한다는 사실을 보고받으신 경애하는 장군님께서는 갓난애기가 비행기에 의해 들출수도 있고 비행기동음에 놀랄수도 있다고 하시면서 판문점을 통해 륙로로 가되 차를 천천히 몰아 어머니와 애기가 불편해하지 않도록 해야 한다고 친부모심정으로 헤아려주시였다.
몇년전에는 넘어서자마자 쇠고랑을 차고 감옥으로 가야 했던 황선녀성이 오늘에는 평양을 고향으로 태여난 옥동녀를 안고 동포애적향기가 풍기는 꽃묶음을 흔들며 판문점분리선을 넘어서는 모습은 《판문점통일실록》에 아로새겨진 명화폭중의 하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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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판문점통일실록》에 새겨진 이상의 사실들은 일부에 지나지 않는다.
분렬의 상징이 통일의 상징으로 바뀌우는 판문점의 년륜에 경애하는 장군님의 위대한 선군정치가 안아오는 6.15통일시대의 격동적인 사변들이 끝없이 새겨지고있다.
우리들은 지난날과 마찬가지로 앞으로도 경애하는 장군님께서 세워주신 21세기 조국통일의 리정표 6.15북남공동선언을 옹호고수하고 관철하기 위한 사업에 모든 지혜와 정열을 다 바치겠다.(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