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양 9월 1일발 조선중앙통신)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력사학학회는 1일 《셔먼》호 격침 140년과 관련한 비망록 《미제는 조선침략의 선도자이고 분렬의 주범이며 전쟁의 원흉이다》를 발표하였다.
비망록은 다음과 같다.
미제침략선 《셔먼》호가 대동강에 기여들어 불법무도한 만행을 감행하다가 평양성군민들의 애국적인 반침략투쟁에 의하여 수장된지 140년이 된다.
대조선침략의 선견대인 《셔먼》호의 침입을 계기로 우리 나라에 대한 미제의 침략이 개시되였고 조선은 렬강들의 세력권쟁탈장으로 되였다.
미제는 조선침략의 첫 단계에서 겪은 참패로부터 응당한 교훈을 찾을 대신 지난 140년간 형태와 수법을 바꾸어가면서 우리 나라에 대한 침략책동을 끊임없이 감행하여왔다.
특히 제2차세계대전후에는 조선을 분렬시키고 전쟁정책을 집요하게 추구하면서 평화통일을 가로막기 위하여 악랄하게 책동함으로써 우리 민족의 철천지원쑤로, 첫째가는 투쟁대상으로 되였다.
1. 《셔먼》호의 정체,미제의 조선침략의 개시
《셔먼》호는 미제가 조선을 저들의 상품시장,원료략탈지로 예속시키기 위하여 《상선》으로 가장시켜 파견한 침략의 척후대였다.
그러나 남조선과 서방의 일부 학자들은 《셔먼》호가 프레스톤 개인의 무역선이였다고 억지주장을 하면서 미국의 침략행위를 비호하고있으며 리조정부의 자위적조치와 평양성인민들의 애국적인 반침략투쟁을 비난하고있다.
력사적사실은 《셔먼》호가 미해군소속의 군함이였으며 프레스톤은 그 배의 선주가 아니라 미국무성이 파견한 전권대표였고 《셔먼》호의 침략을 계기로 조미대결의 력사가 시작되였다는것을 보여주고있다.
19세기 전반기 미국은 무장공격을 전제로 하는 《포함외교》로 아시아나라들의 《문호를 개방》시켜 저들의 식민지로 만들기 위한 책동을 집요하게 벌리였다.
특히 조선반도가 차지하는 전략적중요성을 간파한 미국은 1845년 2월 《조선개방안》이라는것을 들고나와 조선의 《문호를 개방》하는것을 대조선정책의 기본목표로 내세웠으며 미국남북전쟁(1861~1865)이후에는 우리 나라를 주되는 침략대상으로 규정하고 《원정대》조직에 착수하였다.
그 선견대로 뽑힌것이 바로 《셔먼》호였다.
그러면 미국정부의 명령을 받고 조선으로 떠난 《셔먼》호는 과연 어떤 배이며 그 사명은 무엇이였는가?
자료에 의하면 《셔먼》호의 전신은 《프린쎄스 로이얼》이라고 불린 군함이였다.
최근에 알려진 미국 쌘프랜씨스코 박물관 소장자료인 《셔먼호의 전신-프린쎄스 로이얼호》에는 다음과 같은 내용이 적혀있다.
《프린쎄스 로이얼》호는 원래 미국 남부군 해군에서 건조한 밀항선이였는데 북부군에 나포된후 1863년에 전함으로 개조되여 여러 전투들에 참가하여 큰 공을 세웠다. 1865년 말에 … 중국에서의 미합중국의 리익을 보호하기 위해 중국으로 갔으며 거기서 이 배는 《셔먼》호라는 상선으로 개조(위장)되였다. 배수량이 619t, 길이가 60m인 배에는 1개의 추진기, 2개의 보이라와 1개의 굴뚝, 2개의 돛대 그리고 2문의 포가 있었으며 90명의 선원을 태울수 있었다.
이 기록은 《셔먼》호가 증기기관과 돛을 다 갖춘 당시로서는 발전된 미해군소속의 군함이였다는것을 말해준다.
《셔먼》호는 《상선》으로 위장되면서 2문의 포(소완구포-이것은 감추어두었다)를 더 장비하여 4문의 포에 《그 수를 셀수 없이 많은》 장총과 짧은 총, 환도, 다량의 포탄과 탄약을 적재하였다. 승선인원(전투원)은 갑판에 30명밖에 나와있지 않았고 또 그들이 정확한 수자를 밝히기를 거절하였기때문에 90명능력의 배안에 얼마만한 인원이 더 있었는지는 알수 없다.
이렇게 중무장한 배가 침략선이라는것은 명백하다.
때문에 프레스톤일행은 우리측 문정(이양선에 대한 조사)관들에게 《우리 배의 모양은 군함비슷하지만 실은 귀국과 통상하기를 바란다》고 여러번 말했으며 량심적인 학자들은 《셔먼》호는 《외양상 상선처럼 꾸며졌으나 실제로는 중무장한 병함》,《군대를 실은 배》라고 썼다.(《일성록》 고종 병인 7월 22일,7월 15일)
이 모든 사실은 《셔먼》호를 전형적인 아메리카형 스쿠노선(범선)이라고 쓴 상해주재 미국총령사 죠지 시워드 등의 기록을 그대로 되뇌이는것이 얼마나 터무니없는 력사외곡으로 되는가 하는것을 보여주고있다.
《셔먼》호의 사명은 조선을 《개방》시킬데 대한 미국정부의 대조선정책을 집행하는 선견대,척후대로 활동하는것이였다. 《셔먼》호가 《중국에서의 미합중국의 리익》을 보호하기 위하여 중국에 갔고 거기서 《상선으로 개조》되여 조선에 파견되였다는것은 바로 그 배가 미국정부의 지시에 따라 활동하였다는 사실을 말해준다.
또한 선주로 알려진 프레스톤은 미국정부의 1품무관직을 가진 공식관리이고 장교였으며 당시의 미국관례에 따르면 해군소속의 함선은 반드시 국무성의 승인밑에서만 해외에로 파견될수 있었다. 이런 조건에서 미국정부의 고위무관이 해군소속의 군함을 타고 조선에 장사일로 왔다고 하는것은 사리에 맞지 않는다.
하기에 미국인 력사가들도 《셔먼》호가 《상선》으로 가장하고 평양으로 간데 대하여 의혹을 품고 그것을 《신비로운 사명》이라고 야유했으며 《평화적인 상업을 위한 항해로서는 너무나도 중무장을 하고있었기때문에 떠나온 첫날부터 항해의 성격에 대하여 의심을 받았다.》고 썼다.(미국도서 《조선의 문물》 209페지, 미국도서 《은둔국 조선》 392페지)
그러나 당시 비밀에 붙여졌던 《셔먼》호의 《신비로운》 항해성격을 프레스톤 자신이 조선에 와서 루설하였다.
그는 우리 문정관이 따져묻는 말에 《이 일에 대해서는 상세히 말해줄수 없다. 그것은 우리의 사사일이 아니라 바로 국사》이기때문이라고 대답하였다. 그때문에 프레스톤은 전권대표행세를 하면서 하급관리들의 물음에는 성실히 대답하지 않고 도감사를 만나야겠다고 우기였으며 지어 《왕경(수도)》까지 가겠다고 큰 소리를 쳤던것이다. 분명 정부의 신임장이나 협정초안같은 문건을 가지고왔을수 있으나 배와 선원전체가 재가루가 되여버린 조건에서 평양감영의 로획물에는 그런것이 있을수 없었다.
1866년 7월 초 평양을 목표로 한 프레스톤은 중무장한 《셔먼》호의 전투력을 믿고 배를 대동강상류에로 내몰았다.
이양선의 동향을 감시하고있던 지방관리들은 배의 정지를 명령하고 문정관들을 보내여 실정을 료해한 다음 그들이 요구하는 식량 등을 보장해주고 《안바다(강)에 들어오는것은 원래부터 우리 나라 국법이 금지》하는것이니 즉시 돌아갈것을 강경히 요구하였다.
그러나 프레스톤은 《누가 감히 우리의 앞길을 막아나서는가》고 을러대면서 수십명의 무장인원들을 갑판에 줄지어 세워놓고 2문의 포를 3차례나 쏘아 《우뢰같은 소리로 사람들을 놀라게》 하였으며 국적도 밝히지 않고 선내사찰도 거절하였다.
7월 12일에는 6명의 괴한들이 뽀트를 타고 대동강상류에 기여들어 수심을 탐측하고 다음날에는 두루섬에 정박하였으며 18일에는 한사정부근에서 우리측 순영중군일행을 랍치구류하고 다시 상류로 올라가면서 대포와 조총을 란발하며 공격을 개시하였다.
양키들이 울린 이 포성은 《포함외교》의 개시와 그후 백수십년동안 계속된 조선침략의 서막을 알리는 첫 포성이였으며 우리 민족의 자주권에 대한 엄중한 도전이였다.
하기에 조정의 관리들도 《이양선이 전에는 혹시 외양에 오기도 했지만 내지에 기여들어 여러날 묵어있기는 전례없는 일》이라고 경악을 표시하였으며 우리 인민들은 이에 항의하여 투쟁에 떨쳐나섰다.
인민들의 항쟁에 고무된 퇴역장교 박춘권이 단신으로 적함에 뛰여들어 중군을 구출하였다. 그러나 침략자들은 조금도 물러설 기색을 보이지 않았을뿐아니라 22일에는 우리의 상선을 기습하여 량곡을 략탈하고 총포를 쏘아 12명이나 살상하는 만행을 감행하였다.
분노한 평양성군민들은 포사격과 화공으로 대응해나섰다. 평양감사 박규수는 침략선이 여울목에 올라앉은 기회를 리용하여 적함을 소멸할것을 결심하고 조정의 승인을 요구하는 장계를 보냈다.
그러나 김응우선생님께서는 관청의 동향에 관계없이 군중을 동원하여 화공전을 조직지휘하시였다.
7월 24일(양력 9월 2일) 《셔먼》호는 화약고에 불이 달려 폭파하면서 온 배가 삽시에 불길에 휩싸여 재가 되여버렸으며 그안의 침략자들은 《남김없이 섬멸》되였다.(《일성록》고종 병인 7월 25일,27일)
미국통치배들은 해외침략력사에서 치욕의 첫 기록을 남긴 《셔먼》호의 참패에서 응당한 교훈을 찾고 물러갈 대신 무력에 의한 《조선개방》의 야망을 기어이 실현해보려고 더욱 악착스러운 계책에 매달렸다.
미국정부의 날강도적이며 파렴치한 침략계획에 따라 1868년 3월 18일 해군중좌 페비거가 거느린 《쉐난도아》호는 대동강하구지역에 침입하여 살인,략탈만행을 감행하였으며 한편 젠킨스를 두목으로 한 140여명의 악당들은 《챠이나》호를 타고 충청도 아산만에 기여든후 4월 18일 덕산군 관청을 습격하고 남연군묘도굴에 착수하였으나 우리 인민들이 《결사적으로 저항》하였기때문에 더이상 지체할수 없어 뺑소니를 치고말았다.
반인륜과 파렴치성의 절정을 이룬 《남연군묘도굴사건》을 두고 여론은 젠킨스일당을 《불법파렴치범》으로 기소하였고 우리 인민은 《한 하늘을 이고 같이 살수 없는 원쑤》라고 규탄하였으며 《외국인의 대부분은 절도나 강도들》이라고 믿게 되였다.(《고종실록》 권13 13년 정월 28일, 미국도서 《은둔국조선》400페지)
미국무성은 그후 더 큰 모험에 매달렸다.
미국정부는 청나라주재 공사 로우를 전권대표로, 아시아함대사령관 로제쓰를 그의 호위로 임명하고 1871년 3월 하순 일본의 나가사끼에서 《콜로라도》호(3,425t)를 기함으로 한 5척의 군함에 80여문의 대포와 1,230명의 전투원을 탑재한 《조선원정대》를 편성하여 출발시켰다.
강화도 남쪽 물치도앞바다에 침입한 《원정대》는 4월 14일 2척의 군함으로 손돌목을 공격하였으나 우리 포병들의 맹렬한 대응사격에 의하여 《모노카시》호가 파손되자 도망치고말았다. 로우는 파렴치하게도 자기들에 대한 《기습포격은 비인도적야만행위》라고 하면서 조선측은 즉시 사죄와 배상을 하고 협상마당에 대표를 보내지 않으면 상륙작전을 단행하여 《응징》하겠다고 위협하였다.
우리측이 적들의 강도적요구를 일축해버리자 로제쓰는 4월 23일 10개 중대의 륙전대와 포병,공병 등으로 편성된 전투부대를 강화도 초지진에 상륙시켰다. 그러나 적개심에 불탄 우리 군사들의 맹렬한 공격에 의하여 적들은 100여명의 살상자를 남기고 퇴각하였으며 다음날 또다시 광성진을 공격하였으나 역시 드센 반격에 부딪쳐 도망치고말았다.
결국 그처럼 호언장담하며 단숨에 조선을 집어삼킬듯이 미쳐날뛰던 미국《원정대》는 우리 군민들의 용감한 투쟁에 의하여 완전히 패배하고 5월 16일 우리 연해에서 뺑소니치고말았다.
로우자신도 저들의 무장공격이 조선정부에 추호의 영향도 줄수 없었으며또 조선정부의 태도에서 변경이라고 생각되는 그 어떤 징조도 나타나지 않았다고 하면서 《포함외교》로 조선을 굴복시키려던 미국정부의 대조선정책이 완전히 파탄되였다는것을 인정하였다.
결국 미국통치배들은 새로운 침략정책을 모색하지 않을수 없게 되였다.
2. 일제의 조선강점과 식민지통치에 대한 적극적인 지지
남북전쟁이래 최대규모의 《원정대》가 패배한데서 심대한 타격을 받은 미국은 단독으로 조선을 정복하려던 계획을 일단 포기하고 《동맹자》를 모색하게 되였으며 그 적임자로 일본을 선택하였다. 큰 세력을 등에 업고 리득을 챙기려던 일제는 미국과의 공모결탁에 주저없이 가담하였다.
미국은 일본을 조선침략의 돌격대로 써먹기 위하여 일본의 외교법률고문으로 있던 미국인 리젠드르를 내세워 일본정부에 《일본은 조선과 만주를 병합하여야 한다》, 《속히 조선을 침략하고 료동을 제어하며 대만을 점령》하여야 아시아에서 《지도력》을 가질수 있다고 《건의》하면서 해외팽창열에 들뜬 일본사무라이들을 부추기는 한편 일본의 군사행동을 보장해주기 위해 8,000만발의 보총탄과 2척의 배를 서둘러 넘겨주었다.
미국의 사촉을 받은 일제가 1875년 9월 《운양》호사건을 도발하자 일본주재 미국공사 빙함은 《페리의 일본원정소사》라는 책까지 쥐여주며 페리의 강도적수법을 조선에 가서 그대로 적용해보라고 권고하였다.(《미국인 리젠드르건의서》 일본 국가학회잡지 51권, 일본도서 《조선개국외교사》 282페지)
여기에서 힘을 얻은 일본군국주의자들은 온갖 위협과 사기적방법으로 끝내 1876년 2월에 《조일수호조규》(강화도조약)를 강압체결하였다.
《강화도조약》이 체결되자 미국은 때를 만난듯이 환성을 올리면서 일본을 내세워 조선에 불평등조약을 강요할데 대한 침략안을 작성하였으며 《일본의 우의적알선》과 청나라와 일본과의 모순관계를 악용하여 마침내 1882년 4월 6일(양력 5월 22일) 《조미조약》을 강요할수 있었다.
이 《조약》의 체결로 미국은 우리 나라에서 최혜국대우와 령사재판권을 얻었으며 조선에 대한 침략의 지반을 닦을수 있게 되였다. 참으로 《조미조약》은 《강화도조약》과 함께 조선에 강요된 예속적인 불평등조약의 하나였으며 이때부터 우리 나라는 자본주의렬강들의 반식민지로 걷잡을수 없이 전락되여갔다.
19세기 90년대에 들어서면서 조선을 비롯한 극동지역에서의 반침략반봉건투쟁으로 저들의 지위가 상대적으로 약화된 조건에서 미제는 조선에 대한 침략야망을 깊이 숨겨두고 손아래 《동맹자》인 일본의 조선강점을 로골적으로 부추기는 방향으로 나갔다.
조선을 강점하기 위하여 일제가 감행한 두차례의 침략전쟁(청일,로일전쟁)은 미제의 이러한 교활하고 음흉한 정책의 산물이였다.
1894년 청일전쟁을 일으킨 일본의 무모한 행위에 위구를 느낀 영국을 비롯한 유럽렬강들이 간섭할 기미를 보이자 미제는 이른바 《불간섭》의 간판을 내들고 제동을 거는 한편 일본에 대해서는 《베이징을 함락하지 않고서는 결코 진격을 멈추지 말라. … 베이징을 점령하면 강화조건은 생각하는대로 얻을수 있다.》고 입김을 불어넣었다.(《일본외교문서》27권 2책 문서번호 803호, 일본도서 《일청전쟁실기》 18권 89페지)
미제의 음흉한 책동은 로일전쟁시기 더욱 집요해졌다. 조선반도를 둘러싸고 로일사이에 모순이 극도로 격화되였던 1904년 1월 미국대통령 루즈벨트는 도이췰란드와 프랑스에 로씨야의 편을 드는 경우 미국이 일본을 원조하고 간섭해나서겠다는 위압적인 경고를 보냈으며 그리하여 일본은 《로씨야이외의 그 어떤 나라도 적으로 삼게 될 근심이 없이》 전쟁도발에로 거침없이 치닫게 되였다.(미국도서 《루즈벨트와 로일전쟁》 2페지, 일본도서 《외교사》 3권 325페지)
로일전쟁에서 일제가 전과를 확대해나가자 루즈벨트를 비롯한 미제국주의자들은 마치 《일본사람처럼》 기뻐날뛰면서 일본에 무려 1억 5,000만US$의 차관과 7,670만US$의 전략물자를 제공함으로써 일본의 뒤를 든든히 받쳐주었다. 또한 전쟁이 끝나기도전에 《조선은 일본의 강점하에 들어가야 한다》는 립장을 도이췰란드측에 통고하여 무언의 동의를 받아냈고 영국측으로부터는 적극적인 지지를 획득하였다.
미제는 1905년 7월 29일에는 일본과 각서형식으로 《타프트-가쯔라협정》을 조작함으로써 조선강점에 대한 미국의 지지를 법적으로 담보해주었다. 결국 일본은 렬강들의 간섭을 받음이 없이 조선을 병탄할수 있는 유리한 국제적조건을 마련하게 되였다.
비극적인 《을사5조약》과 《한일합병조약》의 조작,강요는 전적으로 범죄적인 미일공모결탁의 산물이였다.
미국지배층은 일본이 조선을 《보호국》으로 만드는것이 조선반도에서 《장래의 화근을 완전히 없애기 위한 훌륭한 행동》이라고 하면서 일본의 조선지배를 적극 고무해주었으며 《동양평화를 위하여 크게 공헌》하였다느니, 《…일본은 시종일관하게 그리고 확고한 정책으로써 조선의 악정을 고치》고 있다느니 하는 넉두리로 일제의 식민지통치를 입이 닳도록 극구 찬양하였다.
3.1인민봉기와 관련하여 세계여론이 일제의 야수적탄압만행을 비난하고있을때 《이 문제는 순전한 (일본의) 내정문제이며 … 일본이 특히 가혹하고 잔인한 조치를 취하였다고는 생각되지 않는다.》는 국무성 성명으로 일제를 비호두둔해나선것도 유독 미국이였다.(미국신문 《크리스챤 싸이언스 모니터》 1919년 4월 21일)
이렇듯 일제의 조선강점과 40여년간의 죄악에 찬 식민지통치의 리면에는 언제나 그를 적극 뒤받침해준 미제의 흉악한 정체가 비껴있었다.
미제는 결코 조선에 대한 일제의 군사적강점을 지지,고무하는데만 머무르지 않았다. 장차 적당한 시기에 조선을 저들의 식민지로 만들려는 야망을 깊이 품고있던 미제는 조선에서 침략적지반을 마련하기 위해 발광하였다. 당시 미제의 종교문화적침략은 바로 조선에서 자기 지반을 확립하기 위한 수단의 하나였다.
《일본이 조선의 정권을 쥐였다면 미국은 조선사람의 심장을 틀어잡을것이다.》 이것이 미제의 검은 속심이였다. 때문에 일제의 조선강점을 계기로 미제는 이른바 《100만명을 그리스도교신자로》라는 구호밑에 종교침략을 적극 벌려나갔다. 1910년에 조선에 기여든 미국선교사는 306명으로서 외국인선교사 총수의 70%를 차지하고있었다. 특히 미국북장로교회가 세계각국에 파견한 선교사의 3분의 1이 조선에 기여든 사실은 당시 미제가 조선에 대한 종교침략에 얼마나 눈이 뒤집혀있었는가를 잘 말해준다.
미제는 종교침투책동과 함께 《계몽》과 《자선》의 탈을 쓰고 교육과 의료 등의 부문에도 마수를 뻗치였는데 그 주요목적은 조선인민의 민족의식과 계급의식을 마비시키고 숭미사대주의사상을 주입시키며 장차 조선에 대한 지배책동에 써먹을수 있는 친미주구들과 고용간첩들을 체계적으로 길러내는데 있었다.
미국선교사들은 《전도》의 구실밑에 각지를 싸다니며 정탐활동을 맹렬히 벌림으로써 미국의 조선침략정책수립에 적극 기여하였는데 미국인들자신이 《…조선과 대양건너편 나라들에 대한 정보의 주요원천으로 된것은 선교사들의 서한과 통보였다.》고 자인하였다.(미국도서 《합중국과 극동》15~16페지)
이 모든 력사적사실은 미제야말로 우리 민족에게 식민지망국노의 운명을강요한 공범자이며 력대로 우리 인민과 한하늘을 이고 살수 없는 철천지 원쑤이라는것을 똑똑히 보여주고있다.
3. 조선분렬의 주범,전 조선지배를 위한 전쟁의 원흉
제2차세계대전후 세계제국주의의 우두머리로 등장한 미제는 《세계제패》를 노리면서 그 실현을 위한 《십자군원정》을 아시아대륙 특히 조선반도에서부터 시작하려고 획책하였다.미제의 이러한 책동은 범죄적인 조선분렬책동으로 막을 올렸다.
원래 일본의 조속한 항복을 받아 전 조선을 강점하려고 꾀하던 미제는 조선인민혁명군의 총공격과 이전 쏘련의 대일참전으로 사태가 불리해지자 조선반도의 절반만이라도 차지해보려고 발버둥쳤다.
그러나 당시 미군은 조선에서 멀리 떨어진 오끼나와와 필리핀에서 어물거리면서 일본본토상륙작전을 준비하고있던 중이였다.
일제의 패망이 박두한 1945년 8월 10일 트루맨은 미 국무,륙군,해군 3성조정위원회 회의를 열고 일본의 항복수락에 관한 문제를 토의하게 하는한편 륙군장교들인 딘 러스크(후의 국무장관)와 챨스 본스틸(후의 《유엔군사령관》)에게 조선반도의 적당한 지역에 미쏘간의 일본군항복접수《분담선》을 그을것을 지시하였다.
러스크가 후에 밝힌데 의하면 그들은 토론끝에 북위 38도선을 택하였는데 그 주되는 리유는 서울과 인천항을 미군의 관할지역안에 포함시키기 위해서였다고 한다.
저주로운 38도선은 이렇게 조작되였으며 미국에 의하여 동방에서는 전패국도 아닌 우리 나라가 분렬되는 비극적사태가 조성되였다.
38도선은 당초부터 쏘미량군이 일본군의 항복을 받기 위하여 그은 일시적인 《분담선》에 불과하였으나 음흉한 미제는 그것을 저들의 세계제패전략실현에 리용할 목적밑에 남조선을 영원히 강점하여 《극동의 전초기지》로 만들려는 야심을 더욱 로골화하였다. 이로부터 미제는 남조선에서 전패국인 일본에도 적용하지 않은 《군정》을 실시하면서 남조선인민들의 투쟁을 무자비하게 탄압하였다.
파쑈가 란무하는 살벌한 분위기속에서 《5.10단선》을 강행한 미제는 범죄적인 전쟁도발에로 줄달음쳐나갔다. 미제는 남조선군을 조직하고 현대적인 군사장비들로 장비시켜 《아시아제1류급의 군대》로 훈련시키는 한편 비밀리에 전쟁도발계획을 면밀히 세웠는데 그것은 한마디로 리승만도당을 부추겨 전쟁을 도발한 다음 《미륙해군의 원조에 의하여 조선의 38도선이북지역을 점령》하는것이였다.(인디아신문 《크로스 로드》 1950년 12월 22일)
한편 미제의 적극적인 부추김밑에 전쟁도발준비가 완성되여가자 리승만도당은 《남북통일의 유일한 길은 이북의 실지(잃은 땅)를 … 힘으로 회복》하는것이며 남조선군은 《3일이면 평양을 점령》할수 있다고 고아댔다. 광란적인 《북벌》소동에 발맞추어 서방세계에서 《작은 전쟁》이라고 부른 무장침공사건들이 38도선 전역을 휩쓸었는데 1949년 한해동안에만도 그 수는 무려 2,617회에 달하였다. 결국 북침전쟁계획은 완전히 수립되였으며 북조선에 대한 공격준비는 1950년 5월에 완결되였다.(미국도서 《조선전쟁은 누가 일으켰는가》 일문 165페지)
1950년 6월 17일 남조선에 기여든 덜레스는 리승만역도에게 전쟁도발지령을 하달하면서 《만약 2주일만 견디여낸다면 이 동안에 미국은 북조선이 남조선을 공격하였다고 제소하면서 유엔으로 하여금 그 이름으로 륙해공군을 동원하지 않을수 없게》 하겠다고 확약하였다.
1950년 6월 25일 조선전쟁을 도발한 미제는 전대미문의 야수적인 만행을 감행하였다. 《설사 그대들앞에 있는것이 어린이나 로인이라 할지라도 그대들의 손이 떨려서는 안된다. 죽이라! 그렇게 함으로써 그대들은 자신을 파멸로부터 구하는것이며 또 유엔군병사의 책임을 다하는것이다.》라고 한 미8군사령관 워커의 살인명령은 미군병사들에 의하여 그대로 집행되였다.
오늘도 원한의 땅 신천은 력사의 증견자로 남아 미제야수들을 단죄하고있다. 전쟁 3년간 미제야수들은 북남조선 전역에서 수백만명의 무고한 인민들을 살륙하였다. 인류력사의 어느 갈피에서도 찾아보기 힘든 미제의 이 살인만행을 두고 1951년 5월 미제의 만행을 현지에서 조사한 국제녀맹조사단의 한 성원은 《히틀러강도배의 그것보다 몇배나 더 참혹한것이였다.》라고 격분을 금치 못하였다.
전후 미제는 조선에 대한 지배야망을 조금도 포기하지 않고 반공화국 고립압살책동을 더욱 로골화하고있다. 아이젠하워로부터 현 부쉬정권에 이르는 력대 미행정부의 대조선전략은 본질에 있어서 핵무기에 의한 군사적압살과 새 전쟁도발책동으로 일관되여있다. 이러한 침략정책에 따라 온 남조선땅은 말그대로 조선인민을 멸살하기 위한 핵무기고로 되였다. 1950년대 후반기에 벌써 조선반도에서 핵문제를 발단시킨 미제는 이미 1970년대 중엽까지 1,000여개의 핵무기를 끌어들이고 54대의 핵폭탄운반용 비행기를 전개해놓음으로써 남조선을 극동최대의 핵전쟁기지로 전변시켰다.(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정부비망록 2000년 5월 30일)
이에 기초하여 미제는 조선반도에서의 핵전쟁계획을 빈틈없이 완성해나갔으며 이러한 전쟁계획에 따라 해마다 년례적으로 벌려놓은 대규모북침전쟁연습으로 인하여 조선반도에서는 언제 한번 포연이 가실 날이 없었다. 미제가 남조선전역에서 벌려놓은 《팀 스피리트》, 《독수리》, 《을지 포커스 렌즈》 등 대규모적인 북침전쟁연습은 무려 1만여건에 이르고 여기에 동원된 병력수는 연 2,000만명을 헤아리고있다.(《조선중앙년감》 2002년 553페지)
미제의 악랄하고 무모한 전쟁도발행위는 전후 조선반도에서 일촉즉발의 긴장상태를 끊임없이 지속시켰다. 전쟁의 포성이 멎은 그날부터 시작된 미제의 군사적도발행위는 1999년까지 기간에만도 무려 15만여건에 달하였다. 1968년 1월 미제무장간첩선 《푸에블로》호 침입사건은 바로 백수십년전 《셔먼》호를 타고 기여들었던 양키선조들을 련상시켜 우리 인민의 반미감정을 더욱 고조시켰다.
1969년 4월에는 《EC-121》 대형간첩비행기가, 1994년 12월에는 미군정찰직승기 《OH-58A/C》가 우리 령공에 침입하였다가 격추되였다. 1976년 8월에 있은 《판문점사건》을 비롯하여 군사분계선일대에서의 위험천만한 군사적도발행위는 매일과 같이 감행되여 조선반도정세를 전쟁접경에로 몰아가군하였다.
백수십년간에 걸친 조선에 대한 미제의 침략과 지배,전쟁책동은 현 부쉬행정부의 극악한 반공화국고립압살과 반통일책동으로 하여 최절정에 이르고있다.
집권하기 바쁘게 이전 행정부시기에 마련된 조미사이의 합의를 전면백지화하고 《악의 축》, 《폭정의 전초기지》라는 악담을 늘어놓아 조선반도정세를 극도로 첨예화시킨 부쉬일당은 《6자회담》의 간판으로 세계여론을 오도하고 《핵문제》, 《미싸일문제》를 부각시키면서 우리에 대한 압살책동을 국제화하려고 발악하고있다.
조선분렬의 주범인 미제는 반세기가 훨씬 넘은 오늘까지도 의연 분렬주의정책을 추구함으로써 통일의 기본장애로 되고있다. 특히 우리 민족이 6.15공동선언의 기치밑에 북과 남이 어깨겯고 《우리 민족끼리》를 눈물겹게 웨치는 력사적사실앞에 전률한 미국은 그를 전면차단하기 위하여 피눈이 되여 날뛰고있다.
미제는 《세계정세 2015》라는 전략안을 작성하여 북조선에 대하여서는 《긴장을 고조》시키고 남조선은 미싸일방위체계에 끌어들임으로써 북남관계를 전면차단하고 조선반도의 통일열기를 거세말살하려는 비렬한 속심을 숨기지 않고있으며 이에 따라 우리 공화국에 대한 군사적위협공갈의 도수를 점점 높이는 한편 북남사이의 대화와 협력,교류에 대하여 사사건건 막아나서고있다.
오늘도 미제는 남조선의 친미보수세력을 규합하여 평화와 통일을 지향하는 시대적흐름을 전쟁과 대결의 국면에로 되돌려세우려고 발악하고있다.
미제의 악랄한 대조선책동으로 말미암아 조국의 자주적평화통일을 념원하는 우리 민족의 앞길에는 의연히 시련과 난관이 겹쌓이고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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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0년간에 걸친 미제의 피비린 조선침략사는 미국이야말로 세기를 이어가며 우리 인민에게 예속과 분렬,전쟁만을 강요해온 조선민족의 철천지원쑤이라는것을 만천하에 고발하고있다.
미국에 대한 온 겨레의 원한과 분노는 구천에 사무치고있다.
오늘 우리 인민이 필생의 신념으로 간주하고있는 선군, 그것은 백수십년간이나 외세에 의해 나라의 자주권과 존엄을 유린당하여온 파란많은 민족사를 통하여 얻은 피의 교훈이며 력사적선택이다.
우리 인민은 선군의 기치를 높이 들고 미제의 죄악에 찬 침략의 력사를 반드시 결산할것이며 력사적인 반미대결전을 기어이 빛나는 승리로 결속지을것이다.
주체95(2006)년 9월 1일
평양(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