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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양은 민족정통무도의 발상지》 력사연구소 소장
(평양 8월 18일발 조선중앙통신)18일부 《로동신문》은 《평양은 민족정통무도의 발상지》라는 제목으로 된 사회과학원 력사연구소 소장 교수,박사 조희승의 글을 실었다.

그 전문은 다음과 같다.

우리 민족은 반만년의 오랜 력사와 찬란한 문화를 가지고있는 슬기롭고 지혜로운 민족이며 남달리 애국심이 강한 훌륭한 민족이다.

우리 민족이 창조한 우수한 문화유산가운데는 조선정통무도인 택견도 있다.

택견은 평양에서 발생하였다. 평양은 택견의 발상지이며 택견은 평양을 중심으로 끊임없이 강화발전되면서 점차 우리 민족의 오랜 무술력사와 문화전통,애국심을 체현하고있는 귀중한 무술유산으로 되였다.

우리 민족의 정통무도인 택견은 발차기를 위주로 하는 도수(맨손)무술로서 세계 그 어느 무술보다 력사가 오래고 우수하며 발전된 위력한 무도이다.

오늘 우리 민족은 국제무대에서 태권도로 민족의 기상과 존엄을 높이 떨치고있으며 세계무술발전과 인류문화발전에 적극 이바지하고있다.

태권도의 력사적뿌리는 바로 일찌기 우리 민족이 창조하고 발전시켜온 조선정통무도인 택견이며 택견은 평양과 더불어 련면히 계승되고 평양사람들에 의하여 완성되였다.

세상에 널리 알려진것처럼 대동강문화의 중심지인 평양은 인류발생지의 하나이며 세계5대문명발상지의 하나로서 고대로부터 근대에 이르는 전력사적기간에 우리 나라의 정치,경제,문화의 중심지로 되여왔다.

평양지방에서 발견된 100만년이전의 구석기시대 유적인 상원군의 검은모루유적과 력포구역 대현동유적, 승호구역 만달리유적 등은 우리 선조들이 평양을 중심으로 이른 시기에 원인,고인,신인단계를 거쳐 인류려명기에 들어섰음을 잘 보여주고있다.

B.C.30세기초에는 평양을 수도로 하는 단군조선이 출현하였다. 평양이 우리 민족의 력사에서 첫 국가인 고조선의 수도로 된것은 평양지방의 지리적위치와 형세, 인류문명발상지로서의 지위로 보아 지극히 당연한것이였다.

평양을 수도로 한 단군조선건립은 우리 민족의 무술발전의 토대를 마련한 의의있는 사변이기도 하였다.

그리하여 지난 시기 주로 맹수들과의 싸움과 종족보존을 위한 수단으로 리용해오던 무술이 국가의 창건과 더불어 조직화되고 체계화될수 있는 사회력사적조건이 마련되게 되였다.

고구려의 창건자 고주몽(동명왕)은 자기를 고조선의 창시자 단군의 아들로 자처하면서 고구려가 고조선의 계승국임을 선포하였다. 그다음 고구려사람들은 민족의 발상지인 평양에 수도를 옮기였다. 그후 평양은 강대국의 수도로 이름을 떨치면서 오랜 력사적기간 우리 나라의 정치,경제,군사,문화의 중심지로 되여왔다.

평양은 예로부터 산수가 수려하고 형세가 독특하며 뛰여난 인물을 수없이 낳은 고장으로도 일러왔다.

고려태조 왕건은 평양은 《수덕이 순조로와 우리 나라의 지맥의 근본이며 대업만대의 땅》이라고 하면서 평양에 의거하여 국가의 안녕을 이룩하라는 유명한 말도 남기였다. 고려말 리조초의 관료이며 이름난 학자인 권근 역시 평양은 《국가의 거진(큰 관문)이며 나라의 근원》이라고 하였고 시인 김황원은 련광정에 올라 평양의 아름다움을 다 담지 못하는 자기의 시재를 탓하며 붓을 꺾었다.

평양의 이러한 력사와 문화는 택견과 같은 민족정통무도가 창조될수 있는 바탕으로 되였으며 특히 평양을 중심으로 한 관서지방의 택견은 오래전부터 《평양날파람》으로 불리우며 세상의 주목을 끌어왔다.

우리 민족의 무술은 이미 고조선시기부터 높은 수준에 있었다.

고조선이 광대한 령토를 차지하고 거듭되는 외적들의 침략을 물리치면서 3,000년이라는 장구한 기간 나라를 유지할수 있었던것은 강한 무술과 떼여놓고 생각할수 없다.

고조선의 무술은 고구려에 의하여 계승되여 보다 높은 발전을 이룩하게 되였다.

위대한 수령 김일성동지께서는 다음과 같이 교시하시였다.

《고구려사람들은 슬기롭고 용맹하였을뿐아니라 조국의 방위를 위하여 충성을 다하는것을 가장 영예로운 일로 생각하였습니다. 때문에 그들은 무술을 배우는것을 남자들의 의무로 여기고 어려서부터 달리기와 말타기, 활쏘기와 칼쓰기를 배웠으며 민간오락과 경기들도 모두 무술을 기본으로 하였습니다.》

중세무술에는 일반적으로 궁술(활쏘기), 마술(말타기), 검술(칼쓰기), 창술(창쓰기) 등이 포함되였는데 고구려의 무술은 이러한 종목외에도 권술(권법)과 석전(돌팔매)까지 포함하고있었다. 이가운데서도 유명한것은 권법이였다.

고구려권법은 손치기와 발차기,머리받기를 위주로 한 위력한 무술이였다.

서해도인 황해남도 안악군에는 고구려 제21대 왕인 고국원왕(331~371년)의 무덤이 있다. 일명 안악3호무덤이라고 부르는 이 무덤의 앞칸 동쪽벽에는 당시의 고구려권법의 겨루기모습이 생동하게 그려져있다.

벽화를 보면 두명의 힘장사가 웃옷을 벗고 샅바만 차고 경기를 하는데 왼쪽장사는 왼손을 드리우고 오른손은 머리우에까지 쳐든것으로 보아 공격자세가 분명하다. 당장에라도 오른손으로 내리치거나 오른발로 올려찰 자세이다.

오른쪽장사는 상대방을 곧바로 보면서 오른손을 앞으로 비껴내민것이 상대방을 견제하거나 막기 위한 자세이다.

두 힘장사는 한결같이 육체적준비가 좋아 팔다리근육이 울퉁불퉁하고 종아리와 허벅다리굵기가 거의 몸체만큼 실하다. 손과 손가락도 유별나게 크다. 이것은 화가의 과장적기법이라기보다 일상시 몸단련,무술훈련을 잘한 고구려힘장사들의 모습을 사실적으로 형상한것이다.

고구려의 두번째 수도였던 국내성(현재 자강도 만포대안에 있는 집안)에 있는 춤무덤(4세기말~5세기)의 벽화에 그려진 권법장면은 두명의 장사가 막 부딪치려는 순간을 박력있게 형상하였다. 오른쪽장사는 허리를 썩 낮춘 자세에서 오른쪽무릎을 굽히고 왼다리를 들어올렸는데 왼손을 앞으로 내밀고 오른손은 상대방을 칠수 있게 겨드랑이까지 끌어당기고있다. 그 모습은 왼다리발길질을 하면서 련이어 오른손주먹질도 하려는 자세로 보인다.

한편 왼쪽장사는 두손을 벌리고 상대방을 향해 날아가려는 자세를 취하고있다. 왼손은 앞으로 쭉 뻗쳤으나 오른손은 약간 끌어당겨 주먹이 우로 가게 꺾은것이 마치도 상대방의 날아들어오는 주먹이나 발길질을 내리치려는 자세같기도 하고 왼쪽무릎을 굽히고 오른다리를 뻗친것은 오른다리발길질을 준비하는것 같이 보인다.

이처럼 안악3호무덤과 춤무덤의 권법장면벽화는 찌르기와 차기,막기의 세가지 기본요소,기본동작을 다 갖춘 매우 세련되고 민첩하고 기교가 높은 권법동작을 보여주고있다.

력사유적들을 통하여서도 잘 알수 있는것처럼 4세기에 벌써 고구려에는 일정한 체계와 위력한 법수를 갖춘 권법이 존재하였으며 이것은 세계적으로 가장 이른 권법이였다.

중국의 하남성 숭산의 소림사권법은 6세기 중엽경을 시작점으로 하고있다. 인디아의 중 달마와 그가 가르쳐주었다는 《선수경》과 《역근경》 등의 보급을 중심으로 소림사권법이 발생발전하였다는 설을 믿는다면 소림사권법은 달마(?~528년)의 생존시기를 거슬러오르지 않는다. 한편 일본의 가라데는 19세기경에 소림사권법을 조상으로 한 여러 류파들중의 하나인 남중국의 남극권류파가 류큐(오끼나와)에 보급되여 생겨난것이다. 따라서 그 시기는 고구려권법에 비길바가 못된다.

우리 민족무술의 력사는 이와 같이 매우 오래다.

고구려무술의 하나로서 또한 돌팔매겨루기가 있었다.

흔히 《석전》(돌싸움)이라고 불러온 이 무술은 고구려때 특별히 성행하였다.

《석전》경기의 주요방법은 두편이 일정한 거리에 갈라져 자기 진지에 각기 기발을 꽂고 앞으로 돌을 던지면서 공격하여 상대방진지에 있는 기발을 빼앗는것으로 승패를 가르는것이다. 《석전》에서는 돌팔매질뿐아니라 여러가지 무술수법들이 다 적용되였는데 이때 고구려권법이 큰 위력을 나타내였다. 이러한 석전을 후세사람들은 《석전은 경기가 아니라 무술재주이다》라고 하였다. 석전은 용감성과 대담성뿐아니라 날랜 동작과 억센 팔매질 등 실전에 필요한 모든 타격동작이 다 포함된 과감한 무술이였다.

이렇듯 뛰여난 고구려무술의 중심지는 평양이였다.

고국원왕무덤벽화에 고구려권법의 겨루기모습이 그려져있는것이 그것을 잘 말해준다.

고구려에서는 해마다 봄이면 전국의 무사들이 락랑언덕에 모여 사냥경기를 벌리였다. 여기서 가장 많은 짐승을 잡은 용감한 무사가 높이 평가되고 장수로 등용되였다.

력사전기 《온달전》도 그 과정에 생겨났다.

고구려의 사냥경기는 종합적무술겨루기로서 말타기와 활쏘기,창쓰기,칼쓰기가 더 포함되였고 때에 따라 주먹질과 발길질,메치기 등 권법이 동반되였다. 따라서 이러한 종합적무술경기인 사냥경기가 진행되는 평양의 락랑언덕은 고구려무술의 중심지가 되지 않을수 없었다.

사냥경기에서 발휘되는 용감성과 높은 무술수준은 그대로 평양사람들에게 체현되여 대대로 전해져내려왔다. 그리하여 고구려의 무술전통을 계승한 평양사람들을 두고 후세사람들은 《맹호출림》(숲속에서 사나운 범이 뛰쳐나오다)의 기상을 지녔다고 하면서 평양사람들은 《기력이 왕성하고 용맹스러운》 사람들이라고 하였다. 그것을 반영하여 학자 권근은 어느 한 책에서 《고구려이래로 말타기와 활쏘기를 잘 습득하여 그 풍속이 많이 변하게 되였다. 그리하여 수나라와 당나라의 군력이 비록 왕성하였으나 이에 굴복하지 않았으니 이를 통하여 그 날래고 용감하며 굳세고 강한 기풍을 가히 알만 하도다.》, 평양사람들은 《고씨(고구려)때부터 상무적기풍이 강하여 사람들은 날래고 용감하였다. 그것으로써 부강지업(부강한 위업)을 이룩할수가 있었다.》고 쓰면서 고구려의 무술을 높이 평가하였다.

평양을 중심으로 하여 발전한 고구려의 무술은 우리 나라의 중세 전기간 그 전통이 면면히 계승되였다.

《발해사람 셋이 모이면 맨손으로 범을 때려잡는다.》라는 속담은 고구려를 계승한 발해사람들의 억센 기상과 함께 발해에서 무술로서의 권법이 왕성하게 퍼진 사실을 전하고있다. 10세기에는 수십만명에 달하는 발해유민들이 동족의 나라인 고려에 넘어왔다. 그들은 평양을 중심으로 한 서북지방에 살면서 외래침략자를 반대하는 싸움에서 무술 등을 수단으로 하여 용맹을 떨치였다.

고려시기에는 권법이 수박 또는 수박희(수박겨루기)로 불리웠다. 리조 중엽이후부터는 조선권법으로 불리워오면서 그것이 법전에도 고착되여 점차 전국에 퍼지게 되였다.

그후 발과 다리를 위주로 한 택견으로 분화발전하였다.

조선의 권법은 아주 위력하였다. 《고려사》는 맨주먹,맨발로 범을 때려잡은 장수에 대하여 전하고있으며 리조시기의 력대 왕조실록과 야사들은 발길질로 범을 때려잡은 장사들에 대하여서와 8마리의 황소를 나란히 줄세워놓고 뛰여넘으면서 마지막소는 발길로 차서 척추를 부러뜨려 즉사케 한 사실 등 여러 일화들을 전해오고있다. 물론 이러한 이야기들은 조선권법의 위력을 얼마간 전해주는 한 토막에 불과하다.

조선의 권법은 위력하였을뿐아니라 매우 독특하고 민족성이 뚜렷한 조선고유의 뛰여난 도수무술이였다.

도수무술이란 무기나 쟁기를 가지지 않고 하는 무술이라는 말이다.

산이 많은 강토에서 살아온 조선사람들은 허리,다리가 강하고 기상이 억세며 강인하였다. 조선사람들은 농사를 짓는 쉴참과 무술을 닦는 여가에 쟁기없이 겨룰수 있는 씨름과 권법을 익혀나갔으며 그 과정에 일정한 체계성과 법수를 가진 권법을 창조하였다.

우리 나라의 권법은 달리기를 잘하고 허리,다리가 강한 조선사람의 체질적특성과 정의감이 강하고 대담하며 완강한 민족적성격이 반영된 발차기위주의 독특한 겨루기도수무술이였다.

《평양날파람》은 고조선과 고구려에 시원을 두고있는 조선(리조)권법에서 계승발전한 택견의 집합체명칭이기도 하다. 다시말하여 조선의 정통무술인 택견의 주류가 바로 《평양날파람》이고 택견의 발상지,고향이 다름아닌 평양이라는 뜻이다.

《평양날파람》은 력사적으로 평양을 중심으로 하여 널리 보급성행되였다.

《평양날파람》이란 말은 무술을 숭상한 고구려사람들의 후예들이 많았던 평양지방에서 날파람있는 젊은이들이 전통적으로 내려오던 조상전래의 권법과 그에 기초하여 발전된 택견을 널리 활용한데서 유래되였다.

《평양날파람》은 위력이 대단하였고 훈련방법과 훈련체계가 독자적이고 특이하였다. 법수의 동작에는 18법이 있었다고 하며 살법(죽이는 수법)과 활법(살리는 수법)의 여러 비법(비밀법수)이 있었다고 한다.

《평양날파람》은 주먹(손)과 발로 상대방을 제압하고 머리받기도 하는 아주 위력한 도수무술이였다.

날파람군들은 두손을 뒤짐지고 주먹질을 해대는 상대를 각이한 자세의 발길로 걷어차면서 제압하였다. 여기에는 상대방의 하반신(주로 다리)을 걷어차 뒤로 넘어뜨리거나 혹은 좌우로 차서 옆으로 넘어뜨리게 하는 방법, 뛰여오르면서 상대방의 상반신 또는 턱이나 목, 지어는 이마를 차서 넘어뜨리게 하는 방법 그리고 목덜미나 어깨를 차서 넘어뜨리는 방법도 있었다. 단수있는 날파람군들은 높이 도약하면서 상대방의 어깨우에 뛰여오른 다음 눈깜빡할새도 없이 한쪽발을 휘둘러 발뒤축으로 상대방의 뒤통수를 걷어차기도 하였다. 이것은 살법의 위력한 한 기법이였다.

날파람군들의 특기인 발차기에는 형식과 차는 각도에 따라 《원앙각》(두발로 차는것), 《모두걸이》, 《외발걸이》, 《외입붙임》과 같이 이름이 붙어있었다. 그밖에 모두발차기도 있었고 팔굽과 무릎으로 치거나 차기도 하는 법수도 있었다.

《평양날파람》의 특기로서는 찌르기와 발차기외에도 머리받기가 있었다. 5~6m 밖에 떨어져있는 상대방을 제압하기 위해 수평으로 날면서 머리받기로 대방의 면상을 들이받는 수법은 실로 귀신같은 날랜 동작이였다. 날파람군들의 이와 같은 동작은 상대방이 칼이나 총을 휘두를새없이 단행되는것으로 하여 아주 위력하고 효과적이였다.

《평양날파람》의 훈련방법에서 기본은 발차기와 뛰여오르기였다. 처음에는 짚단같은것을 세워놓고 앞으로 나가면서 차고 뒤로 들어오면서 차는 련습에 짚단을 공중에 매달아놓고 뛰여오르면서 차는 련습을 동시에 진행하였다.

공중에 매다는 짚단의 높이는 숙련에 따라 점차 높아지게 하였다. 빨리 자라나는 나무를 심고 아침저녁으로 뛰여넘으며 발차기를 함으로써 조약력을 비상히 높인 실례도 있다.

《차력》은 《평양날파람》의 훈련방법가운데서 특별히 주목되는것이다. 《차력》이란 말그대로 자연의 힘을 빌린다는 뜻이다. 그 내용을 보면 정신을 수양하고 잡념을 없애고 온몸의 힘을 깡그리 손과 발 한곳에 모을 때 거대한 자연의 힘이 인간의 육체로 넘어온다는것이다. 그리하여 일사불란(헝클어지고 얽힌데가 하나도 없다는 뜻)의 정신통일, 무적필승의 정신력이 온몸에 넘쳐나면서 인간의 상상을 초월하는 힘이 온몸에 넘쳐나 막강한 위력이 약동발휘된다는것이다. 이 경우 숨(호흡)조절을 기본으로 하면서 호흡과 손,발놀림을 잘 조절융화시켜야 한다고 했다.

이것은 일종의 기합이였다.

《차력》수련을 잘 쌓은 날파람군만이 진정한 택견명수가 될수 있었다. 이러한 날파람군에게는 무서운것이 없었다.

달려드는 곰을 손가락으로 찔러 곰의 밸을 움켜쥐고 꺼내기도 하였고 달려드는 범의 대가리를 한번의 발차기로 타격하여 범이 즉사케 하였다. 황소의 뿔을 꺾는것쯤은 아무것도 아니였다.

《평양날파람》은 민족의 슬기와 용맹,애국심이 깃든 무술이였다.

고구려때 마을마다에는 《경당》이라는 학교 비슷한 도장(무도장)이라는것이 있었다. 여기서 젊은이들은 글공부도 하고 무술도 닦으면서 심신을 단련하였고 나라를 지키는 전장에 달려나가 용맹을 떨치였다.

실례로 《평양날파람》군들은 《임진왜란》시기 평양에 기여든 소서행장(고니시 유끼나가 ?~1600년)과 그 수하장수 소서비(고니시 히다노가미 죠안 ?~1626년)가 거느린 숱한 왜병들에게 필살의 택견으로 무리죽음을 안겼다. 《임진왜란》때 평양10장사의 한사람이였던 전주복은 맨손으로 돌을 쳐서 깨뜨린다고 하여 일명 전철권(쇠주먹)이라고 불리웠는데 그가 어찌나 날파람있고 주먹이 셌던지 왜놈들은 그의 이름만 들어도 벌벌 떨었다.

근대에 들어와서도 《평양날파람》군들은 외래침략자들과 과감히 싸웠다.

참으로 《평양날파람》은 력사적으로 조국과 향토를 지키기 위한 성전에 자기의 모든것을 아낌없이 바친 우리 민족의 고결한 넋과 비범한 슬기, 무비의 용감성이 깃들어있는 귀중하고 자랑스러운 민족유산이다.

지난날 일제침략자들은 조선에 대한 저들의 식민지통치를 영구화할 목적밑에 우리 민족의 넋이 깃들어있는 모든것을 완전히 거세말살하기 위하여 미쳐날뛰였다.

정통무술 《평양날파람》도 례외가 될수 없었다. 일제는 1908년에 석전(돌팔매싸움), 《평양날파람》을 비롯한 모든 상무적풍습을 금지시키는 한편 조상전래의 권법동작이 집대성되여있는 리조시기의 군사관계도서 《무예도보통지》를 강탈하기 위해 각지를 돌아쳤다.

1790년(정조14년)에 간행된 《무예도보통지》는 칼쓰기와 창쓰기,권법,곤봉술 등 여러가지 무술동작을 그림으로 설명한 매우 희귀한 무술책으로서 조상대대로 국보로 전해온 책이였다. 여기에는 《평양날파람》의 무술동작을 비롯하여 전통적으로 내려오는 조상전래의 무술동작들과 거기에서 파생된 여러가지 무술법수들이 실려있다. 이처럼 력사적으로 내려오는 조선의 각종 무술동작들이 집대성되여있고 나라를 지켜싸우려는 우리 민족의 애국정신이 깃들어있는것으로 하여 《무예도보통지》는 일제의 략탈말살의 대상이 되였다. 그러나 민족의 얼을 간직한 평양을 중심으로 한 관서지방 인민들에 의하여 책은 고수되였고 오늘은 우리 당의 옳바른 문화유적유물보존정책에 의하여 인민대학습당에 소중히 보관되여 나라의 민족문화유산연구와 무술발전사업에 이바지하게 되였다.

우리 민족의 유구한 력사와 애국정신이 깃들어있는 조선정통무도 택견-《평양날파람》과 같은 무술을 가지고있는것은 실로 우리 인민의 커다란 자랑과 긍지로 된다.

태권도의 뿌리와 력사를 잘 알고 우리 민족이 창조하고 발전시켜온 민족고유의 무술을 시대와 현실의 요구에 맞게 더욱 발전시켜나가는것은 주체성과 민족성을 고수하고 우리 조국과 민족의 존엄과 기상을 빛내여나가는 중요한 사업의 하나로 된다.

우리 당의 현명한 령도와 따뜻한 보살핌속에서 우리 민족의 정통무도인 태권도는 시대와 인민의 지향과 요구에 맞게 더욱 훌륭히 계승발전될것이며 국력을 다지고 민족의 체육문화를 꽃피우는데 적극 이바지할것이다.(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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