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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도는 조선민족의 신성불가침의 영원한 령토》-박사 김은택 기고
(평양 6월 21일발 조선중앙통신)21일부 《로동신문》에는 박사 김은택이 기고한 글 《독도는 조선민족의 신성불가침의 영원한 령토》가 실렸다.

그 전문은 다음과 같다.

우리 민족의 존엄과 자주권을 침해하는 일본반동들의 행위가 날로 더욱 우심해지고있다.

지난해 중학교 교과서들에 독도를 《일본의 령토》라고 파렴치하게 외곡서술하여 세계를 분노케 한 일본반동들이 올해에 들어와서는 고등학교 교과서들에까지 그렇게 명기하려 하고있다.지어 그들은 독도부근의 수로탐사를 공공연히 추구하고있다. 이것은 날강도적인 력사외곡책동,독도강탈기도의 발로로서 일본반동들의 조선재침열이 극도에 이르고있다는것을 보여준다.

그러나 일본반동들은 오산하고있다. 오늘과 같은 밝은 세상에서 독도강탈을 노린 그들의 그 어떤 력사외곡,날조행위도 절대로 통할수 없다. 독도는 오랜 옛날부터 국제적으로 공인된 우리 나라의 고유한 령토이다.

위대한 령도자 김정일동지께서는 다음과 같이 지적하시였다.

《독도는 그 누구도 침해할수 없는 우리 나라의 신성한 령토입니다.》

독도가 우리 나라의 불가분리의 령토라는것은 이 섬의 지리적위치자체가 잘 보여준다.

독도는 조선동해의 한복판인 동경 131°52′, 북위 37°14′에 위치하고있는데 비교적 큰 2개의 섬(동도,서도)과 그 주변의 30여개의 작은 암초들로 이루어져있다. 독도와의 거리는 우리 나라 울릉도남단의 간령에서 남동쪽으로 92.6km, 뭍인 경상북도 울진군 죽변리 룡추갑에서 동북쪽으로 218km정도이다. 하지만 일본과의 거리를 보면 독도는 제일 가까운 섬인 오끼섬으로부터는 약 160km, 일본본토의 시마네현으로부터는 약 240km나 떨어져있다. 보는바와 같이 독도는 지리적으로 일본보다 우리 나라와 더 가까이 위치해있는 우리 민족의 령토이다.

독도에 대한 옛 이름들의 유래를 보아도 그것이 우리 나라의 섬이라는것이 명백하다.

력사적으로 고찰하면 이 섬은 처음에 우산도로 그 다음에는 삼봉도,가지도,독도 등 순서로 불리웠다. 이것은 우리 선조들이 이곳을 개척하고 삶을 꾸려나가면서 붙인 이름으로서 모두 조선말에 그 연원을 두고있다.

독도에 대한 첫 이름인 우산도는 고려이전시기부터 불리워진것으로서 울진현(경상북도)의 고구려때 이름인 우진야현(《신증동국여지승람》 권45 울진현 건치연혁조)에서 기원되였다. 우진야현의 《우》자는 삼국시기 우리 말의 웃쪽,웃부분이라는 《우》의 한자식 음옮김이고 《진야》자는 돌이,드르, 들이라는 들판,벌판의 뜻옮김이다. 한마디로 말하여 우진야는 웃도리,웃쪽의 들판이라는 의미로서 이 지대가 다른 지대보다 높거나 우에 있는 지대,들판이라는 뜻을 담고있다. 우산도의 《우》자도 우진야의 《우》자와 같은 음옮김이며 《산》자는 뫼라는 《산》자의 뜻옮김으로서 역시 웃쪽의 산 즉 높은 지대를 가리키며 따라서 그것은 우진야현의 이름과 같은 말이다. 울진현,울릉도의 처음 이름인 무릉,우릉이란 이름도 우산도의 이름과 마찬가지로 우진야현의 이름에서 기원되였다. 이러한 사실은 당시 우진야현(울진현)을 비롯한 주변동해가의 주민들이 동해로 나가 울릉도를 개척하여 살면서 자기 고장의 이름과 같이 무릉,우릉으로 부르고 봄,여름,가을철에 독도에 가서 고기잡이를 하면서 그 섬에 역시 같은 고장의 이름인 《우산》(우산도)이라는 이름을 붙였다는것을 말해준다.

이처럼 독도의 초기이름인 우산도는 높은 지대의 섬이라는 고구려말에서 유래되였고 울진을 비롯한 동해안을 차지하고있던 고구려,신라주민들이 울릉도와 독도를 개척하면서 붙인 이름이다.

삼봉도는 15세기경에 조선동해바다가주민들 특히 함경도주민들이 이 지역에 와서 조사하는 과정에 두개의 큰 바위섬(동도와 서도)과 그 가운데 있는 바위섬을 보고 새롭게 붙인 이름이다. 이것은 리조시기 사람들이 이 섬을 우리 나라의 섬으로 간주하였다는것을 실증해준다.

18세기말부터 이 섬을 가지도라고 불렀는데 여기에서 《가지》는 물개라는 우리 나라 말로서(《증보문헌비고》 권31 여지고19 관방7 해방1 동해 울진조) 섬주변에 물개가 많은 섬이라는 뜻이다. 가지도라는 이름은 이 시기부터 울릉도를 비롯한 조선동해 바다가주민들이 독도에 와서 물개를 많이 잡으면서 붙인 이름이다. 이 섬을 독도라고 부른것은 19세기말부터였다. 독도의 《독》자는 경상도,전라도지방사투리로서 돌을 《독》으로 부른데서 유래된것이다. 독섬이라는 이름은 《돌로 된 섬》이라는 의미를 담고있는데 이것을 한자로 옮겨 독도라고 하였다. 우에서 언급된 독도와 관련된 여러가지 옛 이름들은 모두 조선말이며 우리 나라의 옛 선조들이 이곳을 개척하고 생활을 꾸리면서 붙인것으로서 독도가 옛적부터 우리 나라의 령토였다는것을 잘 알수 있게 한다.

이와는 대조적으로 일본인들은 독도에 대한 이름표기를 통해 독도가 자기 나라 땅이 아니라는것을 스스로 인정하였다. 그들은 14세기말부터 독도에 침입하기 시작하였고 17세기경에 이 섬에 이름을 붙이였다. 그 첫 이름은 마쯔시마 즉 솔섬(소나무섬)이였다. 그들은 울릉도에 대해서는 다께시마 즉 참대가 자라는 섬이라는 의미에서 참대섬이라고 불렀다.

그런데 17세기말 조선의 열혈청년 안룡복을 비롯한 애국적인 어민들의 완강한 투쟁에 의하여 이곳에 대한 일본인들의 침입이 근 200년동안 거의 끊어지게 되였다. 그러다가 19세기말에 와서 일본인들이 다시 독도에 침입하게 되였다. 그때 일본인들은 오인하여 독도를 다께시마로, 울릉도를 마쯔시마로 바꾸어 불렀다. 이러한 력사적사실은 일본인들이 19세기말까지 독도와 울릉도의 이름조차 잘 가려부르지 못했다는것을 립증해준다. 만일 독도가 력사적으로 일본의 섬이였다면 이런 일이 있을수 없는것이다. 일본인들은 오늘까지도 참대가 없는 독도를 계속 참대섬 즉 다께시마라고 부르고있는데 이것은 독도에 대한 무식의 집중적표현이다.

독도는 력사적으로 보아도 우리 나라의 신성한 령토이다.

무인도가 어느 나라에 속하는가 하는 문제를 결정하는데서는 그 섬을 누가 제일 먼저 발견하고 점유,리용하였는가, 그 섬의 소속과 관련된 법적조치를 누가 먼저 취했는가 하는 문제 등이 중요한 조건으로 되며 그에 따라 해당 섬의 소유권이 확증된다.

독도를 제일 먼저 발견하고 개척한것은 우리 선조들이였다. 지금으로부터 수천년전인 고대시기부터 동해를 개척한 고조선,진국사람들은 울릉도,독도에까지 진출하여 이곳에서 물고기잡이를 비롯한 생업활동을 벌리였다. 1882년 부호군 리규원이 울릉도를 조사하러갔을 때 이곳에 고대조선사람들의 주요무덤형식인 고인돌무덤이 남아있었다고 한것(《울릉도검찰일기》)은 그 단적실례로 된다. 울릉도에 고대조선사람들이 살았던것만큼 그곳으로부터 제일 가까운 독도에 건너가 물고기잡이를 한 사람은 조선사람밖에 없었을것이다. 이 시기 일본은 원시사회말기에 있었거나 고대문명의 첫 문어구에 있었다. 때문에 당시 일본인들은 독도에 건너올 엄두도 내지 못하였던것이다. 고증된 력사자료에 의하면 독도는 울릉도와 더불어 지금으로부터 몇천년전에 벌써 고조선,진국을 비롯한 고대조선사람들에 의하여 개척되여 그들의 삶의 보금자리로 되였었다.

삼국시기에 와서 조선동해가를 차지한 고구려,신라의 주민들도 울릉도-독도에 진출하여 어로활동을 벌리였다. 특히 4세기말부터 고구려가 삼국통일을 위한 남방진출을 강화하면서 5세기말~6세기초에는 동해안의 청하(경상북도 포항시)에까지 진출하여 동해안의 대부분을 차지하였으므로 이 시기 울릉도,독도는 고구려사람들의 활무대로 되였다. 이 시기 고구려사람들은 동해의 한류와 난류가 합쳐져 동쪽으로 빠지는 울릉도-독도의 해류길을 따라 일본렬도의 노도반도에 크게 진출하여 그 부근의 나가노현과 그 주변일대에 퍼져 살면서 수천개나 되는 고구려고유의 돌각담무덤을 남기였다. 이러한 사실은 이 시기 울릉도와 독도를 포함한 우산국의 주인들이 고구려사람들이였다는것을 알수 있게 한다. 최근시기 울릉도에서 고구려유물로 보이는 고배(굽높은 잔)가 발견된것은 우연한것이 아니다.

명백히 말하건대 5세기~6세기초에 울릉도와 우산도는 고구려사람들이 물고기잡이를 하면서 생활을 펴나가는 삶의 터전인 동시에 일본렬도에 선진문명을 보급하는 활무대였다.

그후 신라는 령토를 확장하면서 512년에 우산국을 병합하여 자기의 령토에 포함시키고 조공국으로 만들었다. 발해,후기신라시기에도 우산국은 후기신라에 속해있었다.

고려초기부터 우산국은 고려에 속한 조공국으로 되여있었으나 12세기 중엽이후에 우산국이 조락하면서 고려의 울진현에 편입되였다.

1392년에 수립된 리조봉건정부는 왜구의 침입이 잦은것과 관련하여 섬주민들을 보호,통제하려는 목적밑에 섬을 비워두고 수토관을 정상적으로 파견하여 조사장악하고 통제하는 일시적인 《공도정책》을 실시하였다. 리조봉건정부의 《공도정책》은 울릉도-독도에 대한 령유권의 포기가 아니라 변화된 조건에 맞게 실시한 책략적인 령유권행사였다.

19세기 중엽이후에 이르러 일본군국주의자들의 조선침략이 로골화되자 리조봉건정부는 새로운 《개척정책》을 내놓았으며 1900년 10월 25일에는 칙령 제41호를 발포하여 독도에 대한 령유권을 법적으로 세계에 공포하였다.

이와 같이 울릉도와 독도는 우리 선조들에 의하여 수천년전 고대시기에 개척된 이래 근대에 이르기까지 오랜 세월 그들의 생활의 활무대로 리용된 곳으로서 국제적으로 인정,통용되고있는 《무주선점의 원리》에 전적으로 부합되는 우리 나라의 신성불가침의 합법적인 고유령토이다.

앞에서도 언급되였지만 일본인들이 울릉도-독도를 알게 된것은 겨우 14세기말부터였다. 그들은 1905년 일제의 조선강점이전까지 언제한번 이 지역의 령유권을 소유하거나 공포한적이 없었다. 《무주선점의 원리》의 견지에서 보아도 일본인들의 독도발견은 우리 선조들보다 수천년이나 뒤떨어진다. 일제의 조선강점직전인 1905년 2월에 독도를 저들의 《땅》이라고 게시하였다는 《시마네현고시》 40호라는것은 일본정부각료들과 시마네현 관계자들 몇명이 조선강점을 앞두고 몰래 만들어 돌리였을뿐 세계인민들의 눈이 두려워 중앙신문에는 싣지도 못하고 겨우 지방신문인 《산잉신붕》에 간단히 실은 불법무효한 협잡문서였다.

독도가 우리 나라의 령토라는것은 령토의 법적소속을 직관적으로 보여주는 지도표기를 보아도 명백히 알수 있다.

지금까지 전해지는 가장 오랜 지도들인 1530년에 출판된 《신증동국여지승람》(그중 《강원도》지도)과 임진조국전쟁이전(16세기 후반기)에 만든 우리 나라의 오랜 목판본지도인 《동람도》(남조선의 령남대학교박물관 소장)에는 울릉도와 우산도(독도)가 우리 나라 앞바다에 뚜렷이 표기되여있다. 그후 18세기 전반기에 만든 목각본들인 《여도》와 《팔도지도》, 18세기 후반기에 만든 《조선전도》와 《천하지도》(그중 《강원도》지도), 19세기 전반기에 만든 채색필사본인 《여지도》, 목판본인 19세기 중엽에 만든 《해좌전도》, 동판본인 1871년에 만든 《수진일용방》과 목판본인 19세기 후반기에 만든 《팔도전도》, 동판본인 19세기말에 만든 《대조선국전도》, 인쇄본인 1899년에 만든 《대한전도》 등 우리 나라의 옛 지도들에도 울릉도와 우산도(독도 때로는 《우산》이라고 되여있음)가 우리 나라의 섬으로 명백히 표기되여있다.

반면에 우리 선조들이 만든 18세기 후반기의 채색필사본인 《고지도첩》(그중 《일본전도》)과 《천하도》(그중 《일본국도》), 19세기 전반기의 《일본국도》 등 옛 일본지도들에는 일본 시마네현의 오끼섬은 그려져있지만 그 서쪽 조선동해상에 있는 울릉도와 독도는 전혀 그려져있지 않다. 이것은 우리 선조들이 독도를 철저히 우리 나라 섬으로 여기였으며 오끼섬을 일본의 제일 서쪽섬으로 보았다는것을 말해준다.

그런가 하면 조선강점이전시기인 19세기에 일본에서 만들어진 조선지도들에는 독도가 명백히 우리 나라 섬으로 표기되여있다. 1873년에 만든 《조선국세견전도》에는 울릉도와 우산도(독도)가 《강원도》와 같은 연황색으로 그려져있고 1874년에 만든 《오기팔도 조선국세견전도》와 1875년에 만든 《조선여지전도》에도 울릉도와 독도가 조선의 섬으로 그려져있다. 같은 해에 만든 《조선국지전도》에서는 독도의 이름은 밝히지 않았지만 울릉도아래에 섬 하나를 더 그려넣고 두 섬을 다 강원도와 같은 청색으로 표시하였다. 1882년에 만든 《조선전도》와 《조선국세도》에도 울릉도와 독도가 우리 나라의 섬으로 그려져있다.

이러한 사실들은 옛날부터 독도가 조선의 령토였지 일본의 땅이 아니였다는것을 여실히 증명해주고있다.

독도가 우리 나라 령토라는데 대해서는 일본자신도 력사적으로 인정하여왔다.

일본의 도꾸가와막부가 1618년과 1661년에 각기 오다니와 무라가와가문에게 발급한 《죽도(울릉도)도해면허》와 《송도(독도)도해면허》는 해상월경을 승인하는것으로서 사실상 독도에 대한 조선의 령유권을 인정한 일본정부의 공식확인서와 같은것이였다. 이 문건들은 결국 국경을 넘어 외국의 령토인 조선의 울릉도와 독도에로의 항행을 《허용》한다는 증서로서 그것은 조선의 독도령유권인정을 전제로 한것이였다.

1667년에 발행된 《은주시청합기》(1667년 이즈모관리 사이또가 번주의 명령으로 일본의 서북경계를 현지답사하고 제출한 보고서), 1881년에 발행된 《다께시마(죽도) 판도소속고》와 같은 일본책들에는 일본의 서북경계를 오끼섬으로 보고 독도가 예로부터 《일본판도밖의 땅》이였다고 씌여있다.

애국청년 안룡복이 일본해적무리가 울릉도에 침입하여 나무들을 채벌하고 물고기를 마구 잡아가는데 격분하여 1693년과 1696년 두차례에 걸쳐 일본에 건너가 오끼주태수와 담판하고 울릉도와 독도가 엄연한 조선의 령토라는것을 론박할 여지없이 론증확인시킨 사실은 널리 알려져있다.

일본정부(도꾸가와막부)는 1696년 1월 28일 울릉도와 독도가 조선령토라는것을 확인하고 이 섬들에 대한 일본인들의 침입과 어로작업을 엄금시키기로 하였으며 그후 그를 담보하는 공식외교문서를 조선봉건정부에 보내여왔다. 일본정부는 이때로부터 근 200년간 실제로 일본인들의 울릉도,독도침입을 엄격히 단속하였으며 불법침입자들을 사형에 처함으로써 우리 나라와의 공약을 지켰다.

일본은 제2차 세계대전후에도 독도가 저들의 섬이 아니라는것을 국제사회앞에 공식적으로 인정하였다. 그것은 일제의 패망과 함께 일본이 포기해야 할 대상으로 일시적으로 강점했던 모든 지역을 포함시킨 국제협약들인 《까히라선언》,《포츠담선언》 등을 일본이 정식 수락한 사실이 말해준다.

제반 력사적자료들과 사실이 보여주는바와 같이 독도는 명실공히 우리 나라의 신성한 령토이며 일본의 독도《령유권》주장은 얼토당토않은 날강도적인 령토강탈망발이다.

력사는 절대로 외곡,날조할수 없으며 일본반동들의 독도강탈책동은 추호도 용납될수 없다. 일본의 독도강탈야망은 망상이다.

전체 조선인민은 민족공조로 일본의 력사외곡,독도강탈,조선재침책동을 단호히 짓부셔버리기 위해 적극 투쟁할것이다.

독도는 어제도 오늘도 래일도 영원히 조선민족의 신성불가침의 고유한 령토로 남아있을것이다.(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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