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양 5월 29일발 조선중앙통신)29일부 《로동신문》은 《백두산지구혁명전적지 답사길개척의 력사를 더듬어》라는 제목으로 된 개인필명의 글을 실었다.
글의 전문은 다음과 같다.
우리 나라 3천리강토를 한품에 거느리고 조국의 북변에 거연히 솟아있는 혁명의 성산 백두산, 오늘 이 백두산으로 수천만 우리 인민들과 남녘의 동포들,해외동포들과 전세계인민들이 숭엄한 마음을 안고 오르고있다.
백두산에로의 답사길은 지금으로부터 50년전에 개척되였다.
미제가 일으킨 전쟁의 후과로 파괴된 인민경제를 빨리 복구하고 인민생활을 안정시켜야 했고 더우기 나쁜자들이 항일의 혁명전통을 거세말살하기 위하여 온갖 책동을 다하고있던 그때 경애하는 김정일동지에 의하여 백두산지구 혁명전적지 답사길이 빛나게 개척된것은 우리 당 력사에서 하나의 커다란 사변이였다.
50년전의 그 나날에 백두산지구혁명전적지 답사길이 어떻게 개척되였는가를 전하는 가슴뜨거운 사적자료들을 아래에 전하려 한다.
14살 어리신 나이에
경애하는 장군님께서는 14살 되시던 주체45(1956)년에 우리 당 력사에 기록된 거대한 위업을 실현하시였다. 일부 나쁜자들이 항일의 혁명전통을 거세하려고 책동하고있던 당시의 환경에서 위대한 장군님께서 14살의 어리신 나이였지만 당의 혁명전통을 옹호고수하기 위한 투쟁의 전면에 나서시여 실천의 큰걸음을 내짚으신것은 절세의 위인만이 이룩할수 있는 업적이였다.
추억도 새로운 주체45(1956)년 5월 2일 평양제1중학교(당시) 초급반 2학년 분단위원회를 소집하신 경애하는 장군님께서는 이번 여름방학기간에 명승지에 대한 견학과 학급별야영을 하는것과 함께 량강도일대의 혁명전적지에 대한 답사도 예견하는데 그 문제를 가지고 모두가 다 적극적인 태도를 가지고 토론에 참가하게 하시였으며 다음날인 3일 오후 초급반 2학년 소년단분단열성자들의 모임을 지도해주시였다.
경애하는 김정일동지께서는 백두산일대에까지 답사하는것이 결코 헐한것이 아니지만 꼭 가야 한다고 하시면서 이 문제는 자신께서 오늘 비로소 생각하고 결심한 문제가 아니라 이미 오래전부터 굳혀온 결심이라고 하시면서 백두산지구혁명전적지를 답사하는것은 위대한 수령님께서 이룩하신 영광스러운 혁명전통을 고수하고 빛내이기 위한 중요한 문제이면서도 어머님의 간절한 부탁이기도 하다고 뜨겁게 말씀하시였다.
5월말 어느날 경애하는 장군님께서는 위대한 수령님께 학생소년들로 답사단을 조직하여 보천보전투승리기념일을 계기로 량강도안의 혁명전적지들을 답사하려는 의향을 말씀드리시였다.
어버이수령님께서는 경애하는 장군님의 생각을 적극 지지해주시며 항일유격대원들은 그 간고한 시기에도 조국으로 진군하여 보천보도 쳤고 무산지구에서도 싸움을 벌렸다고 하시면서 혁명전적지에 가면 항일유격대원들이 어떻게 필승의 신념을 안고 싸웠는가를 똑똑히 배워가지고 오라고 당부하시였다.
위대한 수령님의 간곡한 당부를 새겨안으신 경애하는 장군님께서는 그 누가 뭐라고 하든 백두의 혁명전통을 옹호고수하실 드팀없는 신념을 지니고 백두산지구혁명전적지에 대한 답사행군을 진행할것을 결심하시였다.
당시의 환경에서 혁명전적지에 대한 답사는 결코 아무런 우여곡절도 없이 순풍에 돛을 단것처럼 쉽게 이루어진것이 아니였다. 어떤 일군은 경애하는 장군님께 아직 길도 잘 트이지 않은 그 먼곳으로 어떻게 가시겠는가, 후날 백두산지구혁명전적지답사의 길이 열리면 다른 사람들의 경험을 배워가지고 가시는것이 어떻겠는가고 하였으며 어떤자들은 처음으로 답사길을 개척하는데 그래도 나이가 어느 정도 있는 사람들이 가야지 14살정도의 소년들은 너무나도 어리다고 학생들을 생각해주는척 하면서 반대해나섰다.
그러나 경애하는 장군님의 립장은 견결하시였다. 그이께서는 백두산지구혁명전적지답사를 기어이 진행하실 결심으로 그 준비사업을 다그치시였다.
경애하는 장군님께서는 여름방학을 리용하여 진행할 보천보혁명전적지를 비롯한 량강도안의 혁명전적지답사와 관련한 문제를 교원들과 충분히 토의하신 다음 소년단대위원회를 소집하시고 위대한 수령님의 불멸의 혁명업적이 숭엄하게 깃들어있는 량강도안의 혁명전적지를 답사하는것이 가지는 의의에 대하여 말씀하시면서 답사로정과 구체적인 일정, 답사자명단을 발표하시였다. 그리고 학생들에게 혁명전적지답사를 보통 원족이나 야영처럼 생각하여서는 안된다고 하시면서 우리는 김일성원수님께서 몸소 걸으신 발자취를 따라 아버지원수님의 위대한 혁명력사를 따라배우러 간다는것을 한순간도 잊지 말아야 한다고 뜨겁게 말씀하시였다.
경애하는 김정일동지께서는 답사기간에 학생들속에서 혁명전통교양을 심화시키기 위하여 혁명전통주제의 교양도서들을 마련하시였다.
답사를 떠나기 하루 전날인 주체45(1956)년 6월 4일 경애하는 김정일동지께서는 당시의 내각사무국 도서실에 가시여 도서실 사서에게 자신께서 래일 학생들과 함께 량강도혁명전적지답사를 떠나게 되는데 필요한 책을 몇권 빌려가려고 왔다고 겸허하게 말씀하시면서 도서 《김일성장군의 략전》과 《보천보의 홰불》,《백두산》을 대출하시였다.
경애하는 장군님께서는 오늘이 력사적인 보천보전투가 있은지 19년이 되는 날이라고 하시면서 보천보전투승리의 의의에 대하여 말씀하시였다.
경애하는 장군님께서는 지금 자라나는 새 세대 청년학생들은 우리 당의 혁명전통에 대하여 잘 모르고있다고,자라나는 새 세대들이 우리 당의 혁명전통에 대하여 모르고서야 어떻게 앞으로 조선혁명을 떠메고나가겠는가고 하시면서 이렇게 말씀하시였다.
《지금 근로자들속에서 혁명전통교양을 하지 않다보니 명승지들에는 답사도 가고 휴양도 가면서 혁명전적지답사는 얼마 하지 않고있습니다. 그래서 나는 이번에 우리 학교학생들로 혁명전적지답사행군을 조직하려고 결심하였습니다. 이번에 량강도혁명전적지를 답사하면서 많은것을 배워가지고 오려고 합니다.》
어버이수령님께서 이룩하신 불멸의 혁명전통을 견결히 옹호고수하시려는 경애하는 장군님의 신념이 담겨진 말씀이였다.
주체45(1956)년 6월 5일 밤 10시, 드디여 평양제1중학교 학생들로 무어진 백두산지구혁명전적지답사단을 태운 렬차가 혁명전통옹호고수의 메아리인양 힘찬 기적소리를 울리며 평양역을 출발하였다.
혁명전적지답사의 목적을 밝혀주시여
혁명전적지답사단을 태운 렬차는 주체45(1956)년 6월 6일 밤 11시 35분에 혜산역에 도착하였다. 역에는 경애하는 장군님께서 오신다는 련락을 받은 량강도 일군들과 학생들이 답사단을 맞이하기 위하여 기다리고있었다. 경애하는 장군님께서는 그들에게 우리는 수령님의 혁명력사를 배우러 왔지 환영을 받으러 온것이 아니라고 말씀하시였다.
평양에서부터 혜산까지의 먼 렬차행군으로 피곤했으나 답사대원들모두는 혁명전적지답사를 하는 기쁜 마음으로 6월 7일 아침일찍 일어나 그이를 모시고 압록강가에 나갔다. 6월이라고 하지만 조국땅 북부에 위치한 압록강의 물은 어찌나 찼던지 학생들은 세면을 대충 하고 물에서 나오려고 하였다.
그러는 그들을 보시던 경애하는 장군님께서는 항일유격대원들은 백두산의 엄동설한에도 눈을 녹여서 세면을 꼭꼭 하였다고 하시면서 혁명전적지답사를 온 학생들답게 답사대원들이 자그마한 시련과 난관앞에서 두려움을 모르는 백두의 혁명정신을 따라배우도록 이끌어주시였다.
경애하는 장군님께서는 이날 오전 답사일정을 토론하시면서도 혁명전적지답사를 하는 기본목적에 맞게 일정을 세우도록 하시였다.
원래 일군들은 그이를 모시는 행사를 자주 조직하는것으로 일정을 세웠다. 그러나 경애하는 장군님께서는 혁명전적지에 환영이나 대접을 받자고 온것이 아니라고 하시면서 그러한 일정을 다 빼라고, 혁명전적지답사에서 기본은 항일혁명투사들의 혁명정신을 따라배우는것이라고 말씀하시였다. 오늘 혁명전적지,혁명사적지답사가 혁명전통교양의 위력한 수단으로서 당원들과 군인들,근로자들을 백두의 혁명정신으로 튼튼히 무장시키는데서 커다란 실효를 거두고있는것은 50년전의 그날 경애하는 장군님께서 백두산지구혁명전적지 답사길을 개척하시면서 답사의 근본목적을 뚜렷이 밝혀주시였기때문이다.
경애하는 김정일동지께서는 력사의 그 나날 혁명전적지답사시기 사업과 생활의 첫 공정을 무엇으로부터 시작하여야 하는가에 대하여 자신의 숭고한 실천적모범으로 가르쳐주시였다.
6월 8일 보천보혁명전적지를 찾으신 경애하는 장군님께서는 먼저 위대한 수령님의 동상이 모셔져있는 곳부터 알아보시고 학생들에게 대렬을 정돈하도록 하시고 답사대원들모두의 마음이 깃든 꽃다발을 드리고 정중히 인사를 올린 다음 질서있게 전적지를 참관하도록 하시였다.
주체45(1956)년 6월 10일 항일유격대원들의 백절불굴의 혁명정신을 실지 생활에 구현하도록 하기 위한 경애하는 장군님의 발기에 따라 답사대원들은 삼지연에서부터 리명수까지의 60여리 길을 행군하면서 행군도중 포태천기슭에서 점심식사를 자체로 지어서 하기로 하였다.
경애하는 장군님께서는 흥분하여 들떠있는 답사대원들에게 서로 돕고 이끌면서 한명의 락오자도 없이 리명수까지 무사히 행군해야 한다고 하시면서 마음을 단단히 먹으면 못해낼 일이 없다고, 사람은 어릴 때부터 산길도 걸어보고 고생도 좀 해보아야 몸과 마음이 단련된다고 말씀하시였다.
답사단이 행군을 다그쳐 포태천기슭에 도착한것은 12시 30분경이였다. 답사대원들이 저마다 밥을 짓겠다고 싱갱이질을 하는것을 보신 경애하는 장군님께서는 강기슭의 버드나무밑을 식사장소로 정해주시고 항일유격대원들과 함께 생활하여본 자신께서 군수관의 임무를 수행하겠다고 하시면서 녀학생들은 선생의 일손을 도와 점심밥을 짓고 남학생들은 산나물도 뜯어오고 불을 피울 마른나무도 주어오도록 임무분담을 하시였다. 그이께서 가르쳐주신대로 답사대원들은 각기 자기가 맡은 임무를 성수가 나서 수행하였다.그리하여 점심식사준비가 인차 되였다.
식사준비를 끝낸 답사대원들은 모닥불주위에 둘러앉았다. 타오르는 모닥불을 근엄한 안색으로 바라보시던 경애하는 장군님께서는 모닥불과 관련한 심원한 뜻이 담겨진 말씀을 하시였다.
《우리는 이 모닥불앞에서 숙영지의 밤하늘에 타오르던 우등불을 생각해보아야 하며 항일혁명선렬들의 숭고한 혁명정신을 따라배워야 합니다.》
경애하는 장군님께서는 계속하여 혁명전적지답사의 첫 행군길을 헤쳐나가는 우리의 영예와 자랑은 참으로 크며 아무 일에서나 첫걸음을 떼는 사람의 영예와 자랑이 남다른것이라고 긍지높이 말씀하시였다. 혁명전적지답사길 개척자로서의 긍지와 자부심을 깊이 새겨주는 귀중한 가르치심이였다.
경애하는 장군님께서는 량강도일대의 혁명전적지들을 잘 꾸리도록 하는데 깊은 관심을 돌리시였다.
경애하는 김정일동지께서는 6월 10일 저녁 혁명전적지를 꾸릴 구체적인 계획이 없다는 보천군 일군들의 이야기를 들으시고 근심어린 어조로 계획마저 없는것을 보니 혁명전적지를 꾸리는 사업을 잘하는것 같지 않다고 말씀하시면서 물론 아직 나라의 형편이 곤난하고 일부 나쁜자들이 혁명전적지를 꾸리는 문제를 가지고 이러쿵저러쿵 시비하고있지만 우리는 어떤 일이 있어도 수령님의 불멸의 혁명업적이 깃들어있는 전적지들을 잘 꾸려놓아야 한다고 하시였다. 그러시면서 이번에 보천보일대의 혁명전적지를 답사하면서 앞으로 량강도에 있는 혁명전적지들을 다 찾아내고 본때있게 꾸려야 하겠다는것을 더욱 절실히 느끼게 되였다고 말씀하시였다.
주체45(1956)년 6월 12일 보천보에 모신 어버이수령님의 동상을 또다시 찾으신 경애하는 장군님께서는 답사대원들에게 가림천기슭에 모신 수령님의 동상을 우러르게 되니 어쩐지 수령님을 뵙고싶은 생각이 더욱 간절해진다고 하시면서 수령님께서 외국방문의 길에 오르신지 벌써 열흘이 되였다고 절절히 말씀하시였다. 어버이수령님께서는 그때 이전 쏘련과 동유럽사회주의나라들을 방문하고계시였다.
우리 인민에게 행복한 생활을 안겨주시려고 한순간의 휴식도 없이 불면불휴의 로고를 바쳐가고계시는 위대한 수령님에 대한 끝없는 그리움을 안으시고 그이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시였다.
《나는 한순간의 휴식도 미루시고 일하시는 수령님을 뵈올 때마다 어서빨리 커서 수령님의 심려를 덜어드려야 하겠다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어버이수령님을 그리시며 끝없이 흠모하시는 경애하는 장군님의 말씀에 답사대원들은 앞으로 훌륭한 일군이 되여 수령님의 높은 뜻을 억세게 받들어나가겠다고 결의다지였다.
이렇듯 경애하는 김정일동지께서는 벌써 50년전에 항일의 빛나는 혁명전통을 옹호고수하고 계승발전시켜나가실 웅대한 구상을 안으시고 백두산지구혁명전적지 답사길을 개척하시였으며 당원들과 근로자들이 답사기간 우리 당의 혁명전통으로 튼튼히 무장하는것을 기본으로 일정과 로정을 세우고 학습과 생활을 하도록 하나하나 가르쳐주시였다.
50년전에 밝혀주신 력사주의원칙
오늘 우리 당은 혁명전적지를 력사주의원칙에서 꾸려 혁명전통교양의 실효성을 높일것을 요구하고있다.
우리 당의 이러한 정책적립장은 이미 경애하는 장군님께서 백두산지구혁명전적지 답사길을 개척하시면서 명확히 밝혀주시였다.
경애하는 장군님께서는 주체45(1956)년 6월 8일 오전 보천보혁명전적지를 찾으시고 위대한 수령님의 동상을 돌아보신 다음 잠시 생각에 잠기시였다가 수령님께서는 보천보전투를 지휘하실 때 싸창을 차시였다고 하시였는데 동상에는 다른 권총을 차신것으로 형상하였다고 력사주의원칙에 어긋나는 문제를 순간에 포착하시고 지적해주시였다.
경애하는 장군님께서는 당시의 국립중앙해방투쟁박물관 보천보분관 2호실에서 항일유격대원들이 보천보전투때 적기관들을 들이치는 사진과 그림들을 보시면서 이런것을 많이 진렬하여야 전적지를 답사하는 사람들에게 보천보전투에 대한 생동한 인상을 줄수 있을것이라고 하시면서 박물관에는 말그대로 자료가 많아야 한다고 가르쳐주시였다.
경애하는 장군님께서는 3호실에서 보천보전투와 구시산전투때에 녹아난 일제놈들의 패망상을 보여주는 자료들과 로획무기들을 보시면서 이런것을 답사를 온 사람들에게 보여주면 일본제국주의자들이 얼마나 우리 인민의 악독한 원쑤인가 하는것을 똑똑히 알게 할수 있다고 사적사업에서 진품을 통한 교양사업을 하여야 한다는 혁명전통교양원칙을 밝혀주시였다.
경애하는 장군님께서는 《농사시험장》옆에 쌓아놓은 콩크리트포대를 보시고 보천보에 있는 모든것에는 다 위대한 수령님의 혁명력사와 투쟁업적이 깃들어있는것만큼 귀중히 보관관리하여 혁명전적지를 답사하러 오는 사람들에게 실물을 보여주면서 교양하며 보천보전투를 직접 목격한 사람들이 이제는 나이가 많은 조건에서 보천보전투에 대한 자료를 빨리 발굴하여야 하겠다고 간곡하게 당부하시였다.
경애하는 장군님께서는 일제가 《면사무소》로 쓰던 건물과 《경찰관주재소》,《소방회관》을 비롯한 보천보에 있는 유적과 유물들을 영원히 보존하기 위한 대책을 철저히 세워야 한다고 사적물영구보존방향에 대하여 가르쳐주시였다.
경애하는 장군님께서는 50년전의 혁명전적지답사기간에 불세출의 위인이신 위대한 수령님의 동상형상에서 지켜야 할 원칙에 대하여 환히 밝혀주시였다.
경애하는 장군님께서는 주체45(1956)년 6월 9일 이른새벽 또다시 가림천기슭에 모신 위대한 수령님의 동상을 찾으시여 주변을 깨끗하게 하신 다음 답사대원들에게 보천보전투를 조직지휘하시여 조선은 죽지 않고 살아있으며 반드시 독립되고야말것이라는것을 온 세상에 선포하신 수령님의 빛나는 혁명업적에 비하여볼 때 동상을 잘 모시지 못하였다고 하시면서 다음과 같이 가르치시였다.
《수령님의 동상은 그 어떤 력사적사실이나 개별적인물들을 잊지 않기 위하여 세우는 동상이나 기념비와는 성격이 근본적으로 달라야 합니다. 수령님의 동상은 어디까지나 조선혁명과 세계혁명을 령도하는 수령으로서의 위대한 풍모와 존귀한 영상이 만사람들의 심장에 안겨오도록 형상하여야 합니다.》
이 세상 그 누구도 따를수 없는 비범한 예지와 천재적지략을 지니시고 조선혁명과 세계혁명을 위하여 불멸의 공헌을 하신 어버이수령님을 최상최고의 경지에서 높이 우러러모셔야 한다는 혁명의 철리를 심어주시는 말씀이였다.
경애하는 장군님께서는 6월 9일 오전 보천보에서 삼지연으로 가시던 도중 중흥등판에서 조종의 산 백두산을 바라보시면서 백두산의 기상이 얼마나 장엄한지 막 힘이 솟고 용기가 난다고, 세계에 백두산처럼 아름답고 장엄한 산은 없을것이라고 격동에 넘쳐 말씀하시면서 기어이 불멸의 혁명사적들을 다 찾아내야 한다고 하시였다.
경애하는 장군님께서는 6월 11일 혁명전적지들을 찾아내는 사업을 잘하자면 먼저 항일혁명투사들로부터 항일무장투쟁시기 자료들을 수집하는 사업을 선행시키고 그 다음에 혁명전적지들을 발굴하기 위한 사업을 해야 한다는 혁명사적사업의 순차에 대하여서도 구체적으로 밝혀주시였다.
위대한 장군님께서는 백두산지구 혁명전적지 답사길개척의 나날에 이 세상에 있었던 중요한 사변들과 큰 일들은 다 사진과 글에 의하여 전해지고있다고 하시면서 답사대원들이 일기를 쓰도록 하시고 그 실천적모범을 보여주시였다. 경애하는 장군님께서는 답사전기간에 걸쳐 아무리 먼 행군로정으로 피곤이 쌓이고 원만한 조건이 보장되지 않으셨지만 밤늦게까지 답사대원들의 잠자리를 보아주시고 일기도 꼭 쓰시고서야 자리에 눕군 하시였다.
어버이수령님께서 장구하고도 간고한 항일무장투쟁시기에 몸소 마련하신 우리 당의 영광스러운 혁명전통을 영원히 빛내여나가며 더욱 널리 소개선전하시기 위해 경애하는 장군님께서 남기신 일기에 담겨진 풍부한 경험과 자료들은 오늘 우리 혁명의 재보로 빛을 뿌리고있다.
주체45(1956)년 당시 량강도와 보천군의 일군들은 보천보에 박물관을 꾸려놓은데 대하여 만족하게 생각하면서 혁명전통교양의 거점답게 전적지를 꾸리기 위한 혁명적인 대책을 세우지 않고있었다.
경애하는 장군님께서는 보천보혁명전적지는 의의가 깊은 곳이고 또 앞으로 우리 인민들은 물론 다른 나라 사람들도 많이 찾아올수 있는것만큼 깨끗하고 교양적의의가 있게 잘 꾸려야 한다고 하시였다.
경애하는 김정일동지께서는 주체45(1956)년 6월 13일 량강도안의 일군들에게 이번에 답사를 하면서 느꼈지만 보천보혁명전적지는 그래도 좀 꾸렸다고 말할수 있는데 삼지연과 리명수일대는 꾸려놓지 않았다고 하시였다. 그러시면서 앞으로 량강도안의 모든 일군들과 인민들은 위대한 수령님을 민족의 태양으로 높이 모시고 일제놈들을 반대하여 싸운 항일유격대원들의 투쟁의 발자취가 스며있는 혁명전적지들을 더 많이 찾아내고 그것을 잘 꾸려야 한다고 가르치시였다.
50년전의 그 나날에 경애하는 장군님께서 밝혀주신 혁명사적사업의 원칙과 방향에 따라 오늘은 온 나라에 혁명전적지,혁명사적지들이 훌륭히 꾸려져 혁명전통교양에 적극 이바지하고있다.
검박성과 겸손성을 지니시고
검박성과 겸손성은 경애하는 장군님께서 어버이수령님과 항일의 녀성영웅 김정숙동지로부터 넘겨받으신 천품이며 인민의 령도자로서 터득하고 체질화해오신 고상한 풍모이다.
주체45(1956)년 6월 6일 밤늦게 혜산에 도착한 답사단은 7일 새벽에 잠자리가 마련되여있는 당시의 혜산제1려관에 들어섰다. 려관의 4호실에 들어섰을 때 도의 한 일군이 경애하는 장군님을 모실 방을 잘 꾸리지 못하여 불편하시겠는데 다른 방으로 옮기실것을 말씀올리자 그이께서는 이불에 새 솜을 두었으니 폭신하겠다고 하시며 그들의 수고를 헤아려주시고 자신께서는 동무들과 같이 한방에서 지내는것을 좋아한다고 뜨겁게 말씀하시였다.
일군들과 학생들이 따스한 아래목에 자리를 잡으시라고 그이께 한결같이 청을 드리면서 잠자리를 펴드리자 경애하는 장군님께서는 자신께서는 웃목에서 쉬겠다고 잠자리를 옮기시였다. 일군들과 학생들이 다시 그이의 잠자리를 아래목에 펴드렸다.
경애하는 장군님께서는 이러다간 날이 밝도록 《잠자리싱갱이질》을 하겠다고, 정 그렇다면 자신께서는 웃목도 아래목도 아닌 가운데에 눕겠다고 하시였다. 그리하여 따뜻한 아래쪽에는 하급학년 학생들이 자리를 잡고 웃쪽에는 2학년 학생들이 자리를 잡아 그이를 한가운데 모시고 자게 되는 숭고한 화폭이 펼쳐지게 되였다.
경애하는 장군님께서는 6월 7일 점심식사때에도 학생들에게 혁명전적지답사기간에 항일유격대원들처럼 생활을 검박하게 할데 대하여 가르치시였고 6월 8일 오전 혜산에서 보천보로 가실 때에는 그이를 모시려고 일군들이 준비하였던 승용차에 녀선생과 녀학생들을 태워 보내시고 자신께서는 학생들과 함께 먼지가 나는 뻐스를 타시고 가시다가 고장난 뻐스의 기화기를 수리하는 운전사를 도와주시는 사랑의 이야기를 수놓으시였다.
이처럼 경애하는 장군님께서는 언제나 자신을 인민들과 조금도 다르게 생각하지 않으시고 절대로 특전을 허용하지 않으시였다.
경애하는 장군님께서는 백두산지구혁명전적지답사의 나날 혁명적동지애의 산 모범을 보여주시였다. 어느날 행군도중이였다. 고산지대의 변덕스러운 날씨가 갑자기 비구름을 몰아왔다. 인차 비방울이 떨어지기 시작하였다.
경애하는 장군님께서는 자신께서 준비하시였던 비옷을 편도선염이 채 낫지 않은 동무에게 주시였다. 그 학생이 자기를 병원에 데리고 가시여 치료대책을 세워주시고 오늘은 또 이렇게 자신께서 쓰시려고 준비하셨던 비옷마저 주시는 그 사랑에 가슴뜨거워 눈물을 머금고 거듭 사양하자 그이께서는 기어이 비옷을 그에게 씌워주시였다.
주체45(1956)년 6월 9일 삼지연림산마을에서는 한 할머니가 경애하는 장군님께서 마을에 오시였다는 소식을 듣고 그이를 뵈오러 찾아왔다. 경애하는 장군님께서는 그 할머니의 손을 따뜻이 잡으시고 수령의 아들이라고 별다른 사람이 아니며 우리는 모두 수령님의 아들딸이라고 말씀하시였다. 그런데 경애하는 장군님을 처음 뵙는 할머니는 그토록 겸허하신 그이를 알아보지 못하였다. 뒤늦게야 자기에게 이야기를 하신 그분이 경애하는 장군님이시라는것을 알게 된 할머니가 두번,세번 그이께 인사를 드리면서 사과하자 경애하는 장군님께서는 마을의 늙은분들에게 먼저 인사를 올리지 못하여 미안하다고 하시면서 온 마을사람들이 답사생들을 환대해주어 감사하다고 사의를 표하시였다.
주체22(1933)년 3월 량수천자의 한 농가에서 장작을 패시며 사령관도 인민의 아들이라고 하시던 어버이수령님의 숭고한 인민적풍모를 그대로 체현하신 그이의 겸허하신 인품에 일군들과 학생들,마을주민들모두가 가슴뜨거움을 금할수 없었다.
주체45(1956)년 6월 10일 한없는 사랑과 따뜻한 보살피심으로 답사대원들을 이끄시고 리명수에 도착하신 경애하는 장군님께서는 검소한 농마국수로 저녁식사를 하신 다음 숙소로 정해진 한 살림집에 이르시였다. 그이의 안녕을 위해 집안식구들을 다른 집에 가서 쉬게 하였다는것을 아신 경애하는 장군님께서는 그렇게 한것은 잘못되였다고, 집안식구들을 데려다 집에서 우리와 함께 자게 하는것이 좋겠다고 하시며 집안식구들을 다 데리고오게 하시였다. 그러시고는 어디에서 일하는가, 나이는 몇살인가 등을 따뜻이 물어주시고 훌륭한 일들을 한다고 평가도 해주시였다. 언제어디서나 인민들과 함께 계시는것을 락으로 여기시는 그이의 고상한 인품에 모두가 감동된 잊을수 없는 하루저녁이였다.
어린시절부터 인민에 대한 열렬한 사랑을 지니시고 우리 인민들에게 유족한 생활을 마련해주시기 위해 모든것을 다 바치시는 경애하는 장군님의 그 로고는 년대와 년대를 이어 세기를 넘어 끊임없이 계속되고있다. 주체93(2004)년 2월 8일 당중앙위원회 책임일군들을 만나신 자리에서 근 50년전에 있었던 백두산지구혁명전적지답사를 회고하시던 경애하는 장군님께서는 그때 리명수에 들렸을 때 자신께서 맛보았던 감자엿이 별맛이였다고, 그래서 감자엿을 한판대기 가져다가 수령님께 드렸댔다고 하시면서 우리는 인민들이 감자엿을 많이 만들어먹도록 장려하여야 한다고, 엿은 한가지로 만들지 말고 물엿도 만들고 강엿도 만들고 가락엿도 만들어야 한다고 말씀하시였다.
경애하는 장군님께서는 주체45(1956)년 6월 11일 아침 어느 한 림산사업소 합숙을 찾으시고 로동자들에 대한 여름철물고기보장사업에 깊은 관심을 돌리시면서 남새가 부족한 이 고장에서는 산나물을 많이 뜯어서 로동자들의 부식물로 리용하여야 한다고 량강도의 실정에 맞는 부식물해결의 방도까지 세심히 가르쳐주시였다.
자신을 평범한 인민의 한 성원으로 여기시고 한평생 인민의 행복을 위해 온갖 로고와 심혈을 다 바쳐가고계시는 경애하는 장군님께서는 50년전 백두산지구혁명전적지답사의 나날에 이처럼 한없는 검박성과 소박성, 숭고한 인민애와 혁명적동지애의 숭고한 귀감을 보여주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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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0년대 중엽에 진행된 백두산지구혁명전적지들에 대한 첫 답사행군은 백두의 기상을 한몸에 지니시고 조선혁명을 주체의 한길로만 줄기차게 전진시켜나가시려는 위대한 김정일동지의 억센 의지와 신념을 내외에 과시한 력사적인 행군으로 우리 당 력사에 기록되여있다.
위대한 령도자 김정일동지께서 백두산지구혁명전적지 답사길을 개척하시면서 이룩하신 혁명업적은 그 불멸의 위대성과 커다란 생활력으로 하여 우리 당의 영광스러운 력사, 주체혁명위업의 년대기에 찬연한 빛을 뿌리고있다.(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