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양 1월 27일발 조선중앙통신)27일부 《로동신문》은 《세기를 이어 애국과 신념의 길로 이끌어주시여》라는 제목으로 된 다음과 같은 개인필명의 글을 실었다.
이 땅에 삶의 뿌리를 내린 모든 가정들이 위대한 선군의 기치따라 원대한 포부와 신심에 넘쳐 강성대국건설에 떨쳐나서고있다.
세기의 언덕을 넘어 세대는 바뀌여도 백두산위인들의 고귀한 사랑과 믿음은 끊길줄 모르는 젖줄기마냥 이 나라의 무수한 가정들에 흘러들어 애국의 피줄기가 련면히 이어지게 하고있다.
작가 박팔양선생과 그 후대들에게 안겨진 은정깊은 사랑과 믿음에 대한 이야기도 하나의 가슴뜨거운 실례이다.
위대한 령도자 김정일동지께서는 다음과 같이 지적하시였다.
《조국에 바친 값높은 생은 조국과 더불어 영생한다.》
세상에 《카프》작가로 널리 알려진 박팔양, 그는 붓대로 애국의 흔적을 남긴 사람이다. 그의 아들 박문재는 통일애국투사 비전향장기수이다.
흐르는 세월과 더불어 혈육들과 친지들의 기억속에서 사라져가던 박팔양선생과 그의 아들이 오늘은 절세의 위인이신 경애하는 김정일장군님의 뜨거운 사랑의 손길아래 조국과 민족이 자랑하는 충신들과 어깨나란히 애국자의 대렬에 서게 되였다.
위대한 태양의 품에 안겨
애국자,
그것은 조국을 열렬히 사랑하는 사람,조국과 민족의 리익을 첫자리에 놓고 그것을 위하여 자신의 모든것을 다 바쳐 헌신하는 사람들에게 조국과 인민이 주는 값높은 칭호이다.
력사에는 유명무명의 애국자들에 대한 이야기가 적지 않게 기록되여있다. 하지만 우리의 백두산위인들처럼 나라와 민족을 불같이 뜨겁게 사랑하시고 조국과 인민을 위해 자신의 모든것을 깡그리 바치시는 절세의 애국자들은 그 어디에도 없다.
일찌기 10대에도 못 이른 어리신 나이에 가슴에서 끓고있는 열렬한 애국심을 《조선독립》이라는 네 글자에 담아 활화산처럼 터치신 때로부터 위대한 심장이 고동을 멈추는 생애의 마지막날까지 한평생 애국의 붉은기높이 잃었던 조국을 찾아주시고 이 땅우에 세상에서 가장 우월한 인민대중중심의 사회주의사회를 세워주신 어버이수령님 같으신 절세의 애국자를 우리는 알지 못한다.
만경대가문의 애국적혈통을 그대로 이으시고 《조선아 너를 빛내리》라는 맹세로 김일성조선,김일성민족을 떨치실 원대하고 숭고한 애국의지를 분출시키신 때로부터 40여년간 특출한 애국정치로 우리 나라를 선군의 최강국으로 강화발전시키신 경애하는 장군님 같으신 희세의 위대한 애국자는 세상에 없다.
애국을 가장 귀중한것으로 여기시기에 위대한 수령님과 경애하는 장군님께서는 그 길에 헌신하는 사람이라면 누구이든 믿음을 주시고 이끌어주시여 애국적인 삶이 조국과 더불어 영원히 빛나도록 해주신다.
곡절많은 운명의 길을 걸어온 박팔양선생도 절세의 애국자이신 위대한 수령님의 태양의 품에 안겨서야 비로소 인생의 봄을 맞이하게 되였다.
온 나라가 해방의 기쁨으로 들끓던 1945년 11월말이였다.
《학생소요사건》으로 신의주에 머무르고계시던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기자들이 인터뷰를 요청해왔다는 보고를 받게 되시였다. 위험을 무릅쓰시고 몸소 신의주에 오시자마자 군중대회에서 《해방된 조선은 어느 길로 나갈것인가》라는 력사적인 연설로 건국의 앞길을 밝혀주신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한초가 천금같이 귀한 때였지만 기자들부터 먼저 만나자고 하시였다. 이렇게 되여 《평북신보》에서 일하고있던 박팔양선생은 다른 한 기자와 함께 백두산청년장군을 뵈옵는 크나큰 영광을 지니게 되였다.
만면에 환한 웃음을 지으시고 몸소 문앞까지 나오시여 그들을 맞아주신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박팔양에게 이미 오래전부터 선생을 알고있었다고 하시며 그의 두손을 뜨겁게 잡아주시였다.
순간 그의 가슴은 해솟는 바다처럼 세차게 설레이였다.
얼마나 뵙고싶었던 항일의 전설적영웅이신가.
빨찌산 김대장을 찾아 만주의 거리와 광야를 얼마나 헤매였던가.
붉게 상기된 얼굴에서 그의 마음을 읽으신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흥분을 눅잦혀주시려는듯 그에게 친히 담배를 권하시고 손수 불까지 붙여주시였다. 그러시고는 결연한 어조로 이번 《학생소요사건》은 당과 대중을 리탈시키고 우리 인민의 애국적인 건국열의를 떨어뜨리려는 불순분자들의 사촉하에 일어났다고 명백하게 지적하시였다.
위대한 수령님의 천리혜안의 예지와 한없이 겸허하신 인품에 완전히 매혹된 박팔양선생은 수령님앞에 신문기사초교지를 내놓으며 보아주실것을 소청드리였다. 붓대로 건국사업에 이바지하려는 그의 마음을 기특히 여기신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몸소 펜을 드시고 기사를 수정가필하여주시면서 기자들은 대중을 새 조국건설에로 불러일으키는 글을 많이 써야 한다는데 대하여 애국의 론리로 강조하시였다. 박팔양선생의 심장은 백두산장군께서 쥐여주신 붓대로 건국사업에 한몸바칠 결의로 높뛰였다.
진보적이고 애국적인 문필가를 찾아내신 위대한 수령님의 기쁨은 한량없으시였다. 초면이였으나 그에 대한 믿음은 생사고락을 함께 한 오랜 동지나 다름없이 크시였다.
박팔양을 만나신 다음날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신의주에 파견되여 일하고있던 김일동지로부터 그의 과거지사를 듣게 되시였다. 일제의 강요로 박팔양은 한때 친일단체에서 일하였었다.그 점을 문제시한다면 버려질수밖에 없었다.한동안 침묵만 흐르던 방에 위대한 수령님의 우렁우렁하신 음성이 울리였다.
… 박팔양은 《카프》시인이였다. 그는 일제통치말기까지 조선말을 지키며 활동한 언론인이였다. 우리는 한때 잘못 산 경력보다 민족성을 지키려는 그의 애국심을 더 귀중히 여겨야 한다. 문필가들은 나라의 귀중한 재사들이다.…
박팔양선생은 그때까지도 자기가 얼마나 위대한 애국자의 품에 안겼으며 어떤 믿음을 받고있는지,자신에게 얼마나 밝은 미래가 약속되여있는지 다는 알지 못하였다. 그것을 깨닫기 시작한것은 몇달후부터였다.
1946년 3월 어느날 박팔양선생은 뜻밖에도 소환장을 받게 되였다. 소환장에는 그를 《정로》(《로동신문》의 전신) 편집부장으로 임명한다는 내용과 함께 위대한 수령님의 친필수표가 있었다.
《김 일 성》
얼마나 위대한 존함인가. 불멸의 존함을 보고 또 보는 그의 두볼로는 뜨거운 눈물이 흘러내렸다.
(아, 영명하신 김일성장군님!)
나라가 갓 해방되다보니 어디서나 인재가 부족하여 애를 먹고있었다. 당보에서도 사정은 마찬가지였다.
당을 창건하시고 뒤따라 당보를 내오신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이 문제도 자신께서 해결해야 할 일로 여기시였다. 한사람 또 한사람 이렇게 자신과 인연을 맺은 문필가들을 그려보시던 수령님의 눈앞에는 박팔양의 모습이 떠올랐다.
한창 일을 제낄 40살나이,크지 않은 키에 다부진 체격,솔직하면서도 고지식한 성미,오랜 기간 신문편집사업을 해온 경험,불타는 애국열의…
당보의 중요한 직책을 맡길만 한 적중한 인물이였다. 파악이 없다면서 머리를 젓는 사람들도 있었지만 수령님의 생각은 다르시였다. 자기의 지혜를 새 조국건설에 바치려는 그의 애국심이 더욱 마음에 드시였다.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박팔양선생을 당보의 초대편집부장으로 임명하시여 그의 정치적생명을 확고히 보증해주시였다.
독자들이여, 건국의 초엽에 새겨진 이 이야기를 우리 어찌 수령과 한 문필가사이에 있은 옛 추억으로만 되새길수 있으랴.
절세의 애국자만이 인간의 마음속에 간직된 애국심을 헤아릴수 있다고 하였거늘 정녕 위대한 김일성동지는 수령이시기 전에 인류가 공인하는 희세의 애국자이시였기에 평범한 문필가의 자그마한 건국열의도 그토록 값높이 여기시고 크나큰 믿음을 주신것 아닌가.
항일의 녀장군 김정숙동지께서 위대한 수령님의 뜻을 받들어 박팔양선생에게 베푸신 지극한 은정에 대한 이야기도 잊을수 없는 추억을 불러온다.
박팔양선생이 항일의 녀성영웅 김정숙동지를 처음으로 뵈온것은 1946년 5월 5일이였다. 이날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몸소 평양시교외의 경치 아름다운 곳에서 정로사 기자들을 위한 야유회를 마련해주시였다.수령님을 모신 이 뜻깊은 자리에 항일의 녀성영웅 김정숙동지께서 어리신 백두산장군과 함께 참석하시였던것이다.
김정숙동지께서는 해빛같은 미소를 지으시고 박팔양에게 위대한 수령님께서 선생에 대한 말씀을 여러번 하시였다고, 만나니 반갑다고 친근하게 말씀하시였다. 야유회의 즐겁고 단란한 정취가 한껏 넘쳐나도록 사려깊은 관심을 돌리시면서 손수 만들어가지고 오신 음식들을 박팔양과 기자들에게 거듭 권하시는 김정숙동지의 자애로운 인품과 덕망은 박팔양선생의 심장과 뇌리에 깊이 새겨졌다.
오락회시간에 박팔양선생은 분에 넘치게도 백두산3대장군께 자작시를 읊어드리게 되였다.
…
마람의 산과 언덕과 들에
꽃피고 새소리 들리니
김일성장군님께서 가져다주신 봄은
이제 완전히 승리자의 봄이로다
그가 시읊기를 끝내자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시인이 다르다고 하시며 치하해주시였다. 김정숙어머님과 어리신 백두산장군께서도 환하게 웃으시며 선참으로 박수를 쳐주시였다.
사랑과 축복,행복이 넘쳐나는 자리였다. 기자들을 정다운 눈길로 바라보시던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그들모두를 곁으로 부르시며 사진을 찍자고 하시였다. 백두산3대장군을 모시고 기념사진을 찍는 박팔양편집부장의 가슴에는 형언할수 없는 격정이 차올랐다.
그날로부터 김정숙동지께서는 그의 사업과 생활에 깊은 관심을 돌리시였다. 기회가 있을 때마다 항일무장투쟁시기 출판일군들의 투쟁이야기도 들려주시고 당보편집사업에서 지침으로 되는 문제들에 대해서도 가르쳐주시였다.
백두산위인들께서 박팔양선생과 맺으신 관계는 천출문학거장과 재능있는 문필가,스승과 제자와의 관계였고 사랑과 믿음,충성과 의리로 주체문단을 기름지워온 참다운 동지적관계였다.
백두산위인들의 뜨거운 동지적사랑과 믿음속에 박팔양선생은 북조선예술총련맹,북조선기자동맹,조선작가동맹을 비롯한 문화예술,출판보도기관의 책임적인 위치에서 붓대로 당의 위업을 충실히 받들수 있었다. 그는 1949년 9월부터 김일성종합대학 어문학부 초대신문학강좌장으로 사업하면서 기자후비들을 키워냈다. 그후에는 작가학원 부원장으로 조동되여 작가양성사업에 전념하였다.
박팔양선생이 절세의 애국자이신 어버이수령님의 태양의 품에 안기지 못하였더라면 인생의 봄을 맞이할수 없었을것이고 건국의 초행길에 뚜렷한 애국의 흔적을 남길수도 없었을것이다.
봄향기넘치는 진달래
위대한 장군님께서는 작가는 시대의 앞장에서 생활을 선도하고 이끄는 기수라고 가르치시였다. 위대한 장군님의 이 명언을 되새길 때면 먼저 박팔양선생의 성장의 모습이 떠오른다.
박팔양선생은 창작의 붓을 쥔 때로부터 1천여편의 시와 가사,극 등 문학예술작품을 발표하여 주체문학발전에 이바지한 애국적인 작가이다. 작품창작으로 위대한 수령님과 경애하는 장군님께 기쁨을 드린 그의 이름은 오늘 조선문단사의 자랑으로 되고있다.
박팔양선생의 창작활동과 영생하는 삶은 문단의 수위에 위대한 영재를 모셔야 작가의 재능도 꽃펴날수 있고 문학작품도 생명력을 가질수 있다는 진리를 확증해준다.
박팔양은 봄을 먼저 알리는 진달래처럼 시대의 꽃이 되려는 결심을 품고 붓을 쥔 사람이다.
1905년 8월 2일에 경기도 수원군의 평범한 가정에서 출생한 박팔양은 경성법학전문학교에 다닐 때부터 시문학에 애착을 가지고 시를 쓰기 시작하였다. 1923년에 처음으로 《물노래》라는 단시 한편을 발표한데서 신심을 얻은 그는 법관이 아니라 시인이 되는 길을 택하였다.
그의 문학활동은 1925년 8월 《조선프로레타리아예술동맹》(카프)결성을 계기로 본격화되였다. 《카프》의 첫 성원이 된 박팔양은 애국의 붓대로 민족의 리익을 옹호하는 문필활동을 힘있게 벌리였다. 그러나 그의 붓은 벼려주는 손길이 없고 보호해주는 품이 없었던탓으로 서울에서도 만주에서도 일제의 칼을 피할수 없었다. 탄압의 칼바람은 가족의 운명까지 롱락하였다. 가슴속에 가득찬 울분이 시 《진달래》에 그대로 담겨졌다.
날더러 진달래꽃을 노래하라 하십니까
이 가난한 시인더러 그 적막하고도 가냘핀 꽃을
이른봄 산골짜기에 소문도 없이 피였다가
하루아침 비바람에 속절없이 떨어지는 꽃을
무슨 말로 노래하라 하십니까?
…
나라없는 그 시절 우리 작가들의 운명은 비바람에 속절없이 떨어지는 진달래나 다름없었다. 박팔양자신이 그 하나의 시든 꽃잎이였다. 필래야 필수 없고 향기도 풍길수 없는 눈물의 진달래를 서글프게 바라보며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고 절규하던 시인들이 아니였던가.
활짝 피여 봄향기풍기는 진달래가 되려는 박팔양의 인생소원을 해방후 위대한 수령님께서 풀어주시였다.
1947년 1월 5일이였다. 몇달전에 박팔양을 비롯한 여러명의 작가들을 부르시여 《애국가》를 창작할데 대한 영예로운 과업을 주신 위대한 수령님께서 이날에 또다시 그들을 만나주시였다.
설한풍 휘몰아치는 백두광야에서 불후의 고전적명작 《피바다》를 비롯한 수많은 문예작품창작으로 인류문학발전에 거대한 공적을 쌓으신 어버이수령님,《사향가》와 같은 명곡으로 세계문화예술의 보물고를 풍부히 하신 백두산문학거장을 다시 뵙게 된 작가들의 얼굴에서는 기쁨이 넘쳐나고있었다. 이날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오랜 시간에 걸쳐 문학예술작품창작방향과 관련한 귀중한 가르치심을 주시였다.
정열에 넘치시여 애국의 붓을 벼려주시는 어버이수령님을 우러르는 박팔양의 가슴에서는 위대한 스승을 모신 긍지가 한껏 넘쳐나고있었다.
(내 붓대로 김일성장군님을 끝까지 받들리라.)
박팔양선생의 심장은 분화구를 터친 활화산마냥 밤낮으로 창작적불을 뿜었다.
그는 고심어린 노력을 기울여 위대한 수령님의 항일혁명업적을 노래하는 장시 《민족의 영예》와 가사 《룡당나루》,장편서사시 《눈보라만리》를 훌륭히 창작완성하였다.서정시 《노래는 강산에 울려퍼지네》에서 그는 영명하신 수령님을 우리 당,승리의 기치,우리의 행복이라고 격조높이 칭송하였다. 애국과 충성으로 충만된 그의 마음은 위대한 수령님을 쉬임없이 따라섰다. 수령경모의 정은 어버이수령님께서 백송리에 찾아오시여 김일성종합대학이 나아갈 앞길을 밝혀주시는 위인적풍모를 그린 시 《수령께서 오시다》에서도 넘쳐나고 《승리자들의 함성》에도 어리였다. 위대한 수령님의 외국방문성과를 축원하는 충성의 마음이 그대로 시어로 엮어진 《영광에 찬 친선의 길》에서도 수령만세의 환호성이 창공을 진동하며 울려나왔다.
희세의 위인이신 우리 수령님에 대한 매혹의 감정이 남달랐기에 그의 작품들에는 어버이수령님의 위인상을 노래하는 이 나라 문인들의 깨끗한 량심과 의리가 그대로 비껴흘렀다.
조국앞에 준엄한 시련이 닥쳐왔을 때 그는 총대와 함께 멸적의 붓대를 틀어쥐고 종군의 길에 나섰다. 서울과 대전을 거쳐 김천으로 남진하면서 창작한 《진격의 밤》,《영용하게 싸워 이기리라》 등 시들은 인민군용사들의 심장에 원쑤격멸의 불을 달아주었다.
시 《천리마의 노래》,《용광로야》,《송남탄광으로》 등 사회주의건설을 추동하는 수많은 작품들은 시인의 심장이 애국으로 불탈 때 시대를 선도하는 명시들을 창작할수 있다는것을 보여주고있다.
박팔양선생의 정력적인 문필활동과 창작적성과는 위대한 스승이신 어버이수령님의 기쁨이였고 락이였다.
1960년 2월 어느날이였다.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몸소 모란봉극장에 나오시여 박팔양선생이 창작한 창극 《황해의 노래》공연을 보아주시였다. 공연이 끝난 후 박팔양을 만나주신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그의 손을 다정히 잡으시고 좋은 작품을 썼다고,내용이 좋다고,인민들을 애국주의사상으로 교양하는데서 중요한 의의를 가진다고 하시면서 거듭 치하해주시였다. 이 작품을 영화로 옮기는것이 좋겠다고 하시며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창극을 현대화하고 주체성과 민족성을 구현한 민족가극을 창작할데 대한 가르치심을 주시였다.
박팔양선생의 온몸은 불덩이를 안은것처럼 뜨거워났다.
평범한 작가가 내놓은 작품의 세부에 이르기까지 사상적으로 깊이있게 분석평가하시면서 창작의 미래를 축복해주시는 어버이수령님에 대한 고마움이 그의 가슴에 한가득 차올랐다.
박팔양선생이 인생후반에 그처럼 풍만한 창작적열매를 거둘수 있은것은 진달래의 꽃망울을 틔워주는 봄우뢰와도 같은 수령님의 태양의 빛발이 있었기때문이다.
애국의 길에 헌신적인 박팔양선생의 모습은 백두산장군들의 위인상과 사회주의제도를 노래한 수많은 작품들에서만이 아니라 후비양성사업에서도 찾아볼수 있다.그는 자신이 다 발휘하지 못한 붓대의 위력을 제자들에게서 보고싶었다.그가 문필가후비양성사업에 정열을 기울인것은 이런 마음에서였다.
오늘 주체문단을 자랑스럽게 빛내이며 인민들의 존경과 사랑을 받고있는 서정시 《어머니》를 창작한 시인 《김일성상》계관인 김철,가요 《높이 들자 붉은기》의 가사를 쓴 시인 《김일성상》계관인 송찬웅,시인 《김일성상》계관인 림금단을 비롯하여 많은 작가들이 그의 제자들이다.
박팔양선생은 태양의 빛발아래 창작의 진달래를 활짝 피웠고 무수한 꽃망울들을 자래우고 1988년에 우리곁을 떠나갔다.하지만 그의 애국의 숨결은 오늘도 높뛰고있다.
주체문학의 위대한 거장이신 경애하는 김정일장군님께서는 조선문학예술발전에 기여한 시인 박팔양을 늘 잊지 않고계시였다.
1992년 1월 20일, 경애하는 장군님께서는 빛나는 예지와 탁월한 사상리론으로 주체문학발전의 넓은 길을 열어주시면서 《카프》와 그 작가들에게 재생의 환희를 안겨주시였다. 위대한 장군님께서는 《카프》시기 박팔양의 창작활동을 평가하시면서 그의 시 《진달래》에 대해서도 언급하시였다.
해방전과 해방후에 창작발표된 시들을 추려 박팔양시선집을 출판하도록 뜨거운 사랑을 베풀어주신 위대한 장군님께서는 그의 작품들을 조선문학사와 문학평론,문학교재에서도 취급하도록 하시였다.
이전 동유럽사회주의나라들에서 령도자를 잘못 만난탓에 재능있는 작가들이 비참한 운명을 당하고 력사의 어둠속에 묻혀버릴 때 우리 나라에서는 인류를 경탄시키는 감동적인 화폭이 펼쳐졌다.
지난해 11월 18일 이 나라 충신들이 영생의 모습으로 서있는 애국렬사릉에 작가 박팔양선생의 유해가 안치되였다. 《카프》의 수난과 함께 붓대마저 꺾이웠던 그가 혁명적의리의 최고화신이신 위대한 김정일장군님의 고결한 사랑속에 온 겨레가 다 아는 박팔양으로 다시 태여나게 된것이다.
묻노니 세계문학사의 어느 갈피에 이런 경이적인 이야기가 새겨진적 있는가.
절세의 애국자 김정일장군님을 모신 김일성조선이기에 사람들의 심금을 울리는 전설적인 서사시가 엮어지고있는것이다.
위대한 장군님의 은덕으로 영생의 언덕에 올라선 작가 박팔양,그 모습이야말로 활짝 핀 진달래가 아니랴.
예로부터 우리 민족을 아리랑민족이라고도 일컬어왔다. 해방전 눈물의 아리랑이 서글프게 울리던 이 땅에서 오늘은 강성부흥아리랑이 뢰성치고 선군의 진달래가 활짝 피여나 존엄높은 김일성민족의 기상을 온 세상에 힘있게 과시하고있다.
항일의 녀성영웅 김정숙동지께서 삼지연못가에서 조국의 향수를 느끼시며 소중히 안아보신 혁명의 진달래,오늘은 백두산선군령장께서 철령의 진달래에 찬란한 미래를 약속해주시며 비약의 폭풍을 일으켜나가신다.
우리는 여기서 력사의 진리를 다시금 새기게 된다. 봄을 부르는 진달래와 같이 아름답게 피려는 애국적인 문필가의 삶도 절세의 위인의 품속에서만 끝없이 빛날수 있다는것을.
사랑과 충성은 세대를 이어
세계적인 파문을 일으키며 실현된 비전향장기수들의 조국귀환!
하늘과 땅이 뒤바뀐것과 같은 인생전환의 시각을 맞이한 통일애국투사들가운데는 박팔양선생의 맏아들 박문재동지도 있다.
수령과 전사들사이에 흐르는 사랑과 믿음의 정은 두터운 분렬의 장벽도 가로막지 못한다.
어느해인가 위대한 수령님과 경애하는 장군님께서는 박팔양의 맏아들이 남조선의 감옥에서 20년나마 신념을 지켜 싸우고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시였다. 두분의 위인께서는 박팔양선생과 남조선의 감옥에서 투쟁하고있는 그의 아들 박문재동지에 대하여 감동깊은 대화를 나누시였다. 어버이수령님께서는 해방직후 박팔양이 고향인 남조선에 가지 않고 공화국에 남아 새 민주조선건설에 한몸바친 애국적인 시인이였다는데 대하여 감회깊은 회고를 하시였다.
박팔양선생이 고향으로 가지 않은것은 위대한 수령님의 품을 진정한 삶의 요람으로 확신하였기때문이다. 중국 장춘에서 만선일보사 기자로 일하던 그가 신의주에 나온것은 1945년 9월말이였다. 서울행 기차를 기다리던 그는 미군이 남조선을 강점하였다는 사실을 알게 되였다. 신물이 나는 식민지노예살이를 다시는 할수 없었다. 부모형제들이 그리웠지만 만주일판에 소문이 자자하던 백두산청년장군에 대한 열화같은 흠모심은 그로 하여금 공화국에 남게 하였다.
그의 선택은 행운의 길이였다. 꿈결에도 그리던 위대한 수령님을 뜻밖에 만나뵈온 박팔양은 충성의 일편단심을 간직하였고 애국의 붓대로 그 맹세를 지켰다.
아버지의 뒤를 이어 아들도 통일애국의 길에서 신념을 지켜 싸우고있다는 사실은 백두산위인들의 심중을 뜨겁게 하였다.
동지만 있으면 강력한 혁명의 주체를 마련할수 있고 그것을 무기로 천하를 얻을수 있다는것을 지론으로,혁명철학으로 삼고계시는 경애하는 장군님의 안광에는 박문재를 포함하여 남조선의 감옥에서 악형을 당하고있는 비전향장기수들의 운명을 책임지실 결연한 의지가 비끼였다.
다음날 전화로 해당 부문 일군을 찾으신 경애하는 장군님께서는 박문재동지의 투쟁공적을 높이 평가하시고 비전향장기수들을 데려오기 위한 대책을 세워주시면서 온 나라가 그를 알도록 해주시였다.
아버지와 자신을 두고 위대한 사랑의 서사시가 엮어지고있을 때 감옥안의 감옥인 특별사동 독방에 갇혀있던 박문재동지는 그 사실을 알수 없었다.
투철한 수령관이 천연바위처럼 심장에 자리잡은 혁명가들의 신념의 기둥은 어떤 광풍에도 흔들리지 않는 법이다. 이른바 《삼천포간첩단사건》으로 사형을 선고받은 박문재동지는 단두대의 이슬로 사라질 각오를 하고 적들과 맞섰다. 결사의 의지가 있었기에 살아서는 나올수 없다던 《중앙정보부》(당시) 남산지하실의 《통닭구이고문》도 이겨낼수 있었다.
적들은 박문재동지를 전향시키려고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았다. 그의 안해를 협박하여 남편과 갈라지도록 하였다. 감방에서 안해의 리혼수속장을 받아든 그는 치를 떨었다.
애국이냐,전향이냐.
량립될래야 량립될수 없는 두갈래의 길이다. 애국이 신념을 지키고 영생하는 길이라면 전향은 신념을 팔아 부귀와 영달을 추구하는 배신의 길이였다.
적들이 전향카드로 내든 리혼수속장도 애국의 한길을 변함없이 걸으려는 박문재동지의 신념을 꺾지 못하였다.
파쑈교형리들은 기어이 그를 굴복시킬 잡도리로 이번에는 아버지문제를 내들었다. 북에 있는 아버지 박팔양이 《추방》되여 《처단》되였다, 이제는 북에 아무런 미련도 가질것이 없지 않는가, 남에는 안해와 자식들도 있고 큰아버지들과 사촌형제들이 수두룩하니 이남사회의 한 성원으로 되는것이 옳은 선택이 아닌가고 하면서 집요하게 달라붙었다.
한때 박팔양선생은 일부 편협한 사람들이 그가 해방전 친일단체에서 일한것을 문제시하면서 그릇되게 처리하여 지방에 내려간적이 있었다. 적들은 이 사실을 과장날조하여 전향공작에 리용하였던것이다.
교활한 적들이 무슨 거짓인들 꾸미지 못하랴만 박문재동지로서는 아버지문제가 생각밖의 엄청난 일이였다.
그가 본 아버지는 백두산위인들의 사랑과 은덕속에 사는 행운아였다.
해방전 만주에서 《학도병》징집을 피하여 집을 떠났던 박문재가 아버지를 다시 만난것은 1946년 가을이였다. 아버지를 따라 집에 들어서던 그는 눈이 휘둥그래졌다. 대부분의 평양시민들이 사는 좋지 못한 집들과는 다르게 아버지의 집은 5칸짜리 덩지큰 독채였던것이다. 창고에는 흰쌀가마니가 쌓여있었다. 동생들도 아무 걱정없이 학교에 다니고있었다.
어안이 벙벙해 서있는 박문재를 집안으로 이끈 아버지는 빙그레 웃으며 위대한 수령님과 항일의 녀성영웅 김정숙동지께서 고급살림집을 마련해주시고 침구류와 흰쌀,아이들 옷가지들과 학용품까지 보내주신 사실이며 당보를 잘 만들라고 오토바이까지 보내주신 이야기를 성수가 나서 하는것이였다.
그로부터 며칠이 지난 어느날 밤이였다. 늦게 집으로 돌아온 아버지는 벙글거리며 안해와 자식들을 불러앉히더니 가방에서 고급양복지와 놋술잔 한개를 꺼내놓으며 이렇게 말하는것이였다.
《영명하신 김일성장군님께서 오늘 또다시 나를 댁으로 부르시여 귀중한 가르치심을 주시면서 식사도 함께 하시였다. 장군님과 김정숙녀사께서 친히 술을 부어주신 술잔이다. 이 양복지도 그분들께서 주신거다. 버림받던 이 몸이 장군님의 품에 안겨 새 조선의 가장 큰 행복자가 되였구나.》
아버지의 영광과 행복은 아들인 자신의것이기도 하였다. 수령의 믿음을 신념으로 간직하고 그에 보답해야 한다는것이 그의 인생관이였다.그는 위대한 수령님께서 아버지에게 베푸신 은덕과 자기를 통일애국의 길에 세워준 당의 믿음을 순간도 저울질하지 않았다. 그것으로 하여 그는 신념과 의지의 강자로 될수 있었다.
박문재동지가 조국으로 귀환되기 하루전이였다. 뜻밖에 맏아들이 찾아왔다.
《그래 아버지는 정녕 북으로 가시려는겁니까?》
《…》
《이북살림이 아직도 어렵다고 합니다. 그리고…》
《그리고 할아버지가 처단된 땅,반겨줄 사람이 없는 그 땅에 무엇때문에 가는거냐 그거겠지?》
아들은 대답이 없었다. 한동안의 침묵을 깨며 박문재동지는 말문을 열었다.
《이 아버지의 이북생활은 해방직후 고작 3년이였다. 하지만 이남에서는 감옥에서 28년,출옥해서 24년을 합쳐 52년이나 살았다. 이북생활 3년이 사람답게 산 3년이였다면 이남생활 52년은 지옥같은 52년이였다.
너도 알겠지만 일가친척이 수두룩한 이 남녘땅에서 아버지는 출옥후 갈 곳이 없어 떠돌이생활을 하였다.
내가 전향을 하지 않은것은 네 할아버지와 이 아버지에게 베푸신 김일성장군님의 은덕과 고마운 조국을 저버릴수 없었기때문이야.
그리고 네 할아버지가 <처단>되였다는 말을 나는 지금도 믿지 않지만 정의로운 이북세상에서 그렇게 된게 사실이라면 무언가 잘못했다는 말인데 아들인 내가 가서 마땅히 벌을 받고 하늘같은 은혜에 조금이나마 보답하는것이 인륜법도가 아니겠니.》
우리는 여기서 박문재동지가 위대한 어버이의 품에 안겨산 나날의 환희와 격정을 다 적지 못한다.
우리 민족사의 자랑찬 갈피에는 경애하는 장군님과 신념의 강자들인 비전향장기수들사이에 뜨겁게 흐르는 혈연의 정에 대한 이야기가 감동깊이 새겨져있다. 위대한 장군님께서는 반세기나마 즙이 없는 차디찬 땅에서 사람대접을 받아보지 못한 박문재동지에게 존엄높은 삶과 행복을 한꺼번에 다 안겨주시였다.
그가 조국의 품에 안긴지 12일째 되는 2000년 9월 14일 저녁이였다. 한 일군을 따라 어느 한 방에 들어서던 박문재동지는 주춤 멈춰섰다.
갖가지 귀한 음식들과 향기로운 꽃들로 화려하게 장식된 식탁으로 그를 안내하며 일군은 말하였다.
《벌써 10년전에 박문재동지의 투쟁업적을 높이 평가하신 위대한 장군님께서는 이번에 비전향장기수송환문제가 제기되자 여러차례나 저희들에게 비전향장기수들가운데 <카프>시인 박팔양의 아들이 있는데 그를 꼭 데려와야 하겠다고 간곡하게 말씀하시였습니다.
며칠전 조국의 품에 안긴 비전향장기수들의 생활을 료해하시던 어버이장군님께서는 오늘이 바로 박문재동지의 생일 78돐이라는것을 아시고 이렇게 은정어린 생일상을 보내주시였습니다.…》
끓어오르는 격정으로 하여 박문재동지는 그 다음의 말을 들을수 없었다. 《처단》되였다는 허위날조된 악담이 떠돌았던 아버지의 모습을 화면에서 볼 때에도,근심걱정없이 살고있는 동생들의 밝은 얼굴에서도 장군님의 은덕을 헤아려보며 가슴들먹이던 그였지만 수십년간이나 남조선의 감옥에 갇혀있던 자기의 운명과 미래까지 책임져주실줄은 정말 몰랐다.
고목에도 꽃을 피우는 경애하는 장군님의 위대한 사랑에 접하게 된 박문재동지는 뜨거운 눈물을 흘리며 목메여 웨쳤다.
《우리 가정의 영원한 은인이신 김정일장군님!》
경애하는 장군님께서는 그의 앞가슴에서 조국이 자랑하는 애국충신의 징표인 공화국영웅메달과 조국통일상메달이 빛나게 해주시였다. 경치수려한 보통강기슭에 자리잡은 그의 집 구석구석까지 장군님의 사랑이 꽉 차있다. 빼앗긴 청춘과 사랑을 되찾아주신 장군님께서는 선군령도의 바쁘신 길에서도 그의 생활을 친어버이정으로 보살펴주고계신다.
세대와 세기를 이어오며 아버지와 아들을 주체혁명위업에 공헌한 애국자들로 나란히 내세워주시고 후대들도 대를 이어 애국의 한길에서 삶을 빛내이도록 보살펴주시는 우리 장군님의 은덕이 어찌 이들 한가정에만 한한것이랴.
조선혁명은 애국으로 시작된 혁명이며 애국의 기치높이 전진하고 승리하는 위대한 혁명이다. 위대한 수령님께서 주체사상의 기치높이 총대로 이 땅에서 망국의 비운을 가셔주시였다. 21세기의 태양 김정일장군님께서는 일심단결의 위력으로 선군조선의 위용을 온 세상에 떨치고계신다.
절세의 애국자 김정일동지,
선군정치는 나의 기본정치방식이다, 내가 총대를 중시하고 선군정치를 하는 한 우리 나라는 끄떡없다, 나는 선군정치로 이 땅우에 강성대국을 건설하고 조국통일위업을 실현할것이다!
백두산령장께서 이 력사의 의지로 선군정치를 펼치시는 한 우리 나라는 끄떡없다.
위대한 헌신으로 뜻깊은 지난해의 마지막나날까지 선군장정의 길에 계시면서 애국의 총대로 내 나라의 푸른 하늘을 지켜주시고 새해정초부터 외국방문으로 민족의 존엄을 빛내여주신 절세의 애국자 김정일장군님께 이 나라의 모든 가정들이 뜨거운 감사의 인사를 드리고있다.
애국의 최고화신 김정일장군님을 민족의 어버이로 모시여 우리 문필가들과 온 나라 인민들의 오늘의 행복이 있고 보다 밝은 미래가 담보되여있다.
위대한 태양의 품이 있어 충성의 삶을 빛내여가는 애국자들의 대오는 더욱 무성한 숲으로 자라날것이다.(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