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양 1월 6일발 조선중앙통신)공화국의 품에 안긴 비전향장기수들이 남조선의 군사파쑈독재《정권》시기 감옥에서 직접 당했거나 목격한 온갖 비인간적이고 야수적인 범죄자료들을 폭로하고 그 주범들을 처벌하며 보상할것을 요구하는 공동고소장을 6일 판문점을 통하여 남조선의 《인권위원회》와 《진실과 화해를 위한 과거사정리위원회》앞으로 보내였다.
공동고소장의 전문은 다음과 같다.
최근 남조선에서는 과거 《유신정권》을 비롯한 력대 파쑈《정권》들이 저지른 비인간적이며 반인륜적인 범죄만행의 진상들이 련속 드러나 내외의 커다란 분노를 자아내고있다.
인류력사에는 파쑈독재와 고문학살만행으로 악명을 떨친 폭군들이 적지 않지만 남조선의 력대 독재《정권》들처럼 그렇게 포악무도하고 잔인한 인간백정,야만적인 살인교형리들은 어디서도 찾아볼수 없다.
남조선의 철창속에서 수십년동안 령어의 몸이 되여 온갖 고통을 당해온 우리 비전향장기수들은 그 야수적만행의 직접적수난자,피해자로서 공화국의 품에 안긴 지금도 그때를 생각하면 몸서리쳐진다.
파쑈통치배들의 만행은 인권과 민주주의에 관한 국제법적견지에서 보나 온 민족이 화해와 단합,통일로 나가는 대세의 흐름으로 보나 반드시 계산되고 준엄한 심판을 받아야 할 특대형 반인권범죄이다.
우리 비전향장기수들은 남조선의 력대 독재《정권》들이 감행한 범죄적만행들을 실지 체험에 기초한 생생한 증언으로 온 민족과 인류량심에 낱낱이 고발하고 제소하기 위해 공동명의로 이 고소장을 발표한다.
전대미문의 극악한 사상전향제도
자주적존재인 인간은 그 본성적요구로부터 선진사상을 선택하고 신념을 지킬 권리가 있다.그러나 남조선에서는 력대 파쑈통치배들에 의하여 그 모든 인간의 자주적권리들이 완전히 무시되고 횡포하게 유린되였다. 그것을 안받침하고있는것이 바로 사상전향제도이다.
전대미문의 극악한 사상전향제도로 하여 우리 비전향장기수들은 30~40년의 기나긴 세월 남조선의 철창속에서 참을수 없는 야만적인 고문과 박해,학대를 강요당하지 않으면 안되였다.
사상전향제도는 원래 일제가 만들어낸것이다. 지난세기 초 우리 나라를 강점한 일제는 류례없는 가혹한 식민지통치를 실시하면서 《치안유지법》에 걸어 애국자들을 닥치는대로 검거투옥하고 야수적으로 처형,학살하는 한편 조선사람의 넋을 깡그리 말살해보려고 식민지동화정책을 악랄하게 추구하면서 과거 어느 폭군시기에도 있어본적이 없는 악명높은 사상전향제도라는것을 내왔다.
이 사상전향제도는 일제가 패망한후 남조선을 강점한 미제와 그 주구들에 의하여 그대로 재연되였다.미국의 비호밑에 남조선《정권》은 식민지통치를 유지하고 자주,민주,통일을 위한 인민들의 지향을 가로막기 위하여 일제때의 사상전향제도를 보다 파쑈적으로 개악한 《남조선판》 사상전향제도를 조작하였다.
악명높은 《보안법》과 《반공법》,《사회안전법》, 《보안관찰법》 등은 그 추악한 산물이였다.남조선파쑈통치배들은 이 악법의 몽둥이를 휘둘러 통일애국의 길에 나선 의로운 사람들을 가혹하게 탄압하면서 사상전향책동을 악랄하게 감행하였다.
특히 1960년 《5.16군사정변》으로 《정권》의 자리에 들어앉은 군사깡패들은 《정치범은 전향을 하든가 그렇지 않으면 죽어야 하는 두 길만이 있을뿐이다》, 《공산주의자는 단 한명도 없이 씨를 말려야 한다》고 하면서 형무소들의 간판을 《교도소》로 바꾸고 《교화》의 이름밑에 사상전향공작을 집중적으로 벌렸다.
파쑈통치배들의 사상전향책동은 특히 7.4공동성명발표이후 절정에 이르렀다. 군사독재《정권》은 조국통일3대원칙이 천명된 7.4공동성명발표로 온 남조선땅이 끓어번지고 각계층 인민들속에서 련북통일기운이 급격히 높아가는데 당황하여 영구집권을 위한 《유신》체제를 조작하는 한편 《정치범》들에 대한 사상전향전문기구까지 내오고 통일애국투쟁에 나섰던 사람들의 사상과 신념을 꺾어보려고 피를 물고 날뛰였다.
이에 따라 1973년 7월에는 《법무부》,《내무부》,《중앙정보부》의합동으로 《전향공작전담반》이라는것이 만들어졌고 그것이 중심이 되여 각 《교도소》별로 대대적인 《전향》테로가 벌어졌다. 당시 박정희《정권》은 《교회사》, 《중앙정보부》와 《보안사》 직원, 전직 《형사》들로 《전향공작전담반》을 구성하였는데 이자들은 모두 대전《교도소》《전향공작전담반》 3조 조장 박왕종과 같이 해방전 일제에게 붙어 순사질을 하면서 애국자들을 체포처형하는데 앞장섰던 악질 친일분자들이거나 미국의 끄나불이 되여 자주,민주,통일을 위하여 나선 사람들을 닥치는대로 테로학살한 친미역적들이였다.
《전향공작전담반》의 교형리들은 우리 비전향자들에게 《대통령》의 지시라고 하면서 《전향하라. 죽느냐 사느냐가 너희들 자신에게 달려있다》고 강박하였으며 우리를 전향시켜보려고 갖은 살인적고문만행을 다 들이대였다. 이로 하여 숱한 《정치범》들이 감옥귀신이 되여 바깥세상 한번 보지 못한채 억울하게 희생되였다.
《유신》파쑈도배들은 그속에서 간신히 살아남아 《형기만료》로 출소한 사람들에 대해서는 《사회안전법》을 휘둘러 그후에도 계속 사상전향을 악착하게 강요하였다.
군사독재《정권》은 1975년 7월 남조선 각지에 있는 《비전향자들의 준동을 사전에 봉쇄》한다는 구실밑에 반인권적악법인 《사회안전법》이라는것을 조작하였으며 이 악법을 걸고 사회에 나간 비전향장기수들의 일거일동을 눈에 쌍심지를 켜고 감시통제하였다. 그리고 저들의 비위에 조금이라도 거슬리게 되면 체포령장도 없이 즉시에 다시 구속하였으며 이를 거부하는 사람에 대해서는 재판도 없이 《보안감호소》에 집어넣었다.
내(김영태)가 있던 청주《보안감호소》만 하여도 이렇게 재구금된 《감호자》가 1975년에 59명이였으며 그후 계속 불어나 1989년에는 《보안감호처분》을 당한 사람이 157명에 달하였다. 《사회안전법》에 의하여 재판도 없이 끌려가 가혹한 옥살이를 하는 과정에 많은 사람들이 철창속에서 학살되였다. 1953년 6월에 체포되여 21년간 감옥살이를 하고 출소하여 막로동으로 살아가던 나(함세환)와 그리고 김인서,김영태도 《사회안전법》에 걸려 또다시 《교도소》에 재수감되게 되였다.
남조선파쑈《정권》은 우리 비전향자들이 《교도소》와 《보안감호소》에서 수십년간이나 모진 옥고를 치르고 출옥한후에는 《보안관찰법》이라는 악법에 또다시 걸어 사상전향을 강요하였다.
1989년 6월에 공포된 《보안관찰법》은 일제시기 《치안유지법》에 의하여 감옥살이를 한 사람들중에서 사상전향을 하지 않은 독립투사,사회운동가들을 사회로부터 영원히 격리,구금시키기 위해 조작된 《조선사상범예방구금령》이나 조선의 애국자들을 감시,감독하며 그들의 활동을 봉쇄하기 위하여 조작된 《조선사상범보호관찰령》과 그 성격과 체계,법률조항에 있어서 꼭같은 현대판 반인권악법이였다.
《보안관찰법》으로 하여 우리 비전향자들은 또다시 철창없는 감옥살이를 하지 않으면 안되였다. 이 파쑈악법에 의하여 우리 비전향장기수들은 명목상 감옥에서 풀려나왔다고는 하지만 자유롭게 사람들을 만나거나 려행할수 없었고 3개월마다 본인이 만난 사람의 인적사항과 장소,날자 및 내용, 려행지에 대해 보고해야 하는 등 언제나 삼엄한 감시속에서 살아야 했으며 이를 어겼을 경우에는 징역형을 받아야 하였다.
1988년 11월 서울의 한 강당에서 《민가협》과 《기독교교회협의회》(NCC)의 공동주최로 진행된 《보안감호자 출옥장기수선생 환영회》때의 일이다. 당시 파쑈당국은 《보안관찰법》을 명분으로 수백명의 폭압경찰을 내몰아 우리 비전향장기수들이 이 환영회에 참가하지 못하게 가로막았다. 그리고 현장을 급습하여 경찰의 봉쇄망을 피해 환영회에 참가한 일부 비전향장기수들을 강제련행하는 만행을 감행하였다. 이로 하여 리종,김영승,임방규,강종건,한백렬,권락기,최남규 등이 환영식장에서 나오는 길로 사법경찰관들에게 끌려갔다.
나(리두균)의 경우에도 1995년 8월 세계최장기수 김선명의 출옥을 계기로 《민가협》과 운동권이 마련한 《출소환영문화제》에 참가하기 위하여 행사장소인 경희대학교에 가려다가 매복하고있던 형사들에게 랍치되여 서울에서 100리가 넘는 포천군에까지 끌려가는 악행을 당하였다.
《보안관찰법》으로 하여 우리 비전향장기수들은 남조선에 남아있던 마지막날까지 모든 인권을 박탈당하고 온갖 박해와 압박에 시달리지 않으면 안되였다. 우리 비전향장기수들이 보통 30~40여년씩 감옥살이를 하였다고 하지만 《보안관찰법》의 철쇄에 묶이여 말할 권리,보고 듣을 권리,거주와 려행의 권리까지 빼앗긴 그 지긋지긋한 10여년의 철창없는 감옥살이까지 합하면 우리는 반세기이상의 세월을 인간세계와 격페된 철창속에서 보냈다고 할수 있다.
세인을 경악케 하는 파쑈교형리들의 전대미문의 사상전향제도로 말미암아 우리 비전향장기수들은 인생의 가장 귀중한 시절을 지옥같은 남조선의 철창속에 묻어버리지 않으면 안되였다.
이 세상에 인간의 사상과 신념을 짓밟아버리기 위하여 《보안법》과 《반공법》,《사회안전법》과 《보안관찰법》 등 악법들을 줄줄이 만들어놓고 인생의 마지막까지 따라가면서 그렇듯 악착하게 사상전향을 강요한 그러한 범죄의 기록이 남조선말고 그 어디에 또 있었는가.
참으로 인간의 고귀한 넋인 사상과 신념을 꺾기 위하여 조작된 극악한 사상전향제도는 남조선의 력대 파쑈통치배들의 반인륜적범죄만행을 고발하는 력사의 산 증거물이다.
지옥의 0.75평 살인감방
력대 남조선의 파쑈통치배들이 감행한 사상전향책동의 범죄성은 우리 비전향자들을 가두어넣은 지옥같은 감옥실태를 통해서도 낱낱이 고발되고있다.
그 대표적인 례가 대전《교도소》이다. 대전《교도소》는 원래 일제가 중죄를 진 수형자들을 감금하기 위하여 만들어놓은 특별감옥이였다. 《유신정권》은 이 감옥안에 또 하나의 감옥인 《특별사동》을 만들어놓고 거기에 우리 비전향자들을 몰아넣었다.군사파쑈도당은 후에 이런 《특별사동》을 대구,전주,광주 등 남조선각지의 《교도소》들에도 내왔다.
《특별사동》은 0.75평의 비좁은 독감방으로 되여있다. 한사람이 발을 펴고 편안히 누울수조차 없는 이 감방에는 뒤쪽에 조그마한 창문이 하나 있는데 거기에는 철창과 2중으로 철망이 쳐있었고 그것마저 널판자에 골탄칠을 한 가림판으로 막아버리여 해빛한점 스며들지 못하였다.또한 감방의 앞쪽에는 밥을 넣어주는 식구통과 간수가 감방내부를 감시하는 사찰구가 달린 출입문이 하나 있었지만 이것도 평시에는 모두 닫겨져있어 감방안은 캄캄하였다.
지붕이 세멘트로 되여있는 감방은 여름에는 직사광선이 내려쪼여 열기가 확확 달아오르는 한증칸으로 되고만다. 설상가상으로 한쪽에 놓여있는 변기에서는 악취가 코를 찌르고 구데기가 온 감방바닥과 벽을 하얗게 덮군 하였다.
교형리들은 이러한 살인지옥에 우리 비전향자들을 한명도 아니고 때로는 여러명씩 밀어넣었다. 광주《교도소》의 교무과장 강철형을 비롯한 《전향공작전담반》의 악질교형리들은 한사람이 발을 펴고 눕기도 힘든 0.75평 독방에 우리 비전향장기수들을 12명씩이나 강제로 집어넣었다.
찌는듯한 더위로 숨이 꺽꺽 막히는 삼복때 비좁은 독감방에 10여명이 콩나물시루처럼 빽빽이 갇혀있다나니 온몸이 물주머니가 된데다가 서로 엎치고덮치여 팔조차 뺄수 없어 모기떼가 달려들어도 어쩔수 없었다.
교형리들은 이 비인간적인 처사에 우리가 항거하면 뒤수정(한손을 어깨너머로 하여 뒤로 수갑을 채우는것)하여 0.75평보다 더 비좁은 0.5평의 《징벌방》,일명《먹방》에 처넣었다.
내(김은환)가 대전《교도소》에 있을 때 교형리들은 전향을 거부한다고 하여 나를 《먹방》에 감금하였다. 감방안에 들어서니 앞은 캄캄하고 보이는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감방바닥을 상처투성이의 맨발로 쓸어보았더니 무엇인가 쌀알만 하고 물큰물큰한것들이 쭉 깔려있었다. 구데기였다. 숨쉬기 어려울 정도로 변기통에서는 역한 냄새가 풍겼고 파리와 모기,쥐새끼가 나를 괴롭혔다. 뒤수정을 한 상태로 있었으니 주는 꽁보리밥도 개처럼 엎드려서 먹어야 하였고 잠도 엎드려 자야 하였다. 캄캄한 감방에서 무릎을 바닥에 댄채 엎드려 입으로 보리밥덩이를 먹느라면 감방바닥에 깔린 구데기까지 입에 들어왔다. 이런데서 하루이틀도 아니고 2년을 살았다.
0.75평의 독감방과 0.5평의 《먹방》은 여름에는 사람을 찌물쿠는 한증칸이지만 겨울에는 랭동고로 변하였다. 성에가 끼고 얼음이 깔린 감방에서 우리들은 찢어지고 터진 홑깝대기의 수인옷만 걸치고있었다. 혹독한 추위에 견디지 못하여 대전《교도소》에서 김하영이 얼어죽었고 거의 모든 비전향자들이 동상을 입었다. 몸이 거장이였던 유재인도 추운 겨울에 몸에 맞지도 않는 작은 홑옷을 걸치고있다가 기관지염과 페결핵에 걸려 각혈하던 끝에 희생되였다.
파쑈교형리들은 우리 비전향자들에게 최소한의 식사조건과 운동시간도 보장해주지 않았다. 군사독재《정권》시기 우리 비전향자들에게 제공된 식사란 당시 남조선 《교도소》식사기준으로도 제일 낮은 4등식, 5등식이였는데 그것은 보리쌀 80~90%에 콩을 10% 되나마나하게 섞어 크기가 세면비누나 혹은 장기쪽만하게 형틀에 찍어낸것들이였다. 이것을 일명 《가다밥》이라고 불렀는데 우리들은 한입에도 차지 않는 이 작은 밥덩어리를 단번에 삼키면 배가 고파 견딜수 없어 다음 식사가 들어올 때까지 한알한알 세면서 씹어삼키지 않으면 안되였다.
교형리들은 이 보잘것없는 꽁보리밥덩어리마저 전향하면 더 주고 전향하지 않으면 절반으로 줄이거나 아주 주지 않겠다고 하면서 제대로 주지 않았다. 너무도 배가 고파 감방에 들어온 쥐를 잡아 생채로 먹는 경우도 있었고 겨우 차례진 운동시간에 마당에 돋아있는 풀을 정신없이 뜯어먹다가 피가 터지도록 매를 맞는 경우도 있었다.
어찌다 차례진 솔방울만한 밥덩어리를 손에 쥐고 피가 줄줄 흐르는 입에 가져다 대고 먹으려다가 그것마저 씹을 기력이 없어 그대로 절명하는 사람들도 있었다. 파쑈교형리들은 죽은 사람이 남긴 이 피묻은 밥도 아무에게나 주는것이 아니라 시체옆에서 하루밤 자는 사람에게만 먹게 하였다.
우리 비전향자들에게는 독서와 면회,편지거래 등 외부와의 련계가 일체 차단되였다. 수십년을 인간세계와 완전히 격페된 상태에서 정신,육체적고통을 받다보니 45년 최장기수 김선명을 비롯한 우리 비전향장기수들은 실어증에 걸려 출옥후에도 언어구사를 제대로 할수 없었다. 또한 항상 머리를 숙이고 꿇어앉아 있어야 하였으므로 그 자세가 화석처럼 굳어져버렸다.
빛 한점 스며들지 않는 캄캄하고 비좁은 독감방안에서 《숨쉬는 화석》이되여 더위와 추위,굶주림속에 수년,수십년을 지내야 하는 그 고통을 체험해보지 못한 사람은 알수 없다. 파쑈교형리들의 비인간적만행으로 수많은 우리 동지들이 질식되여 죽고 굶어죽었다.
인생의 허무감이 물밀듯이 밀려오고 참기 어려운 고독과 고통으로 인간의 모든 감각기관이 마비되여 미칠 지경이 되다못해 이 지옥에서 벗어나 보려고 차라리 죽음을 선택하고싶은 생각마저 들때도 있었다.그때 만일 우리가 마음의 기둥,신념의 기둥이 없었더라면 삶을 백번도 더 포기하였을지 모른다.
우리 비전향자들이 수십년을 고통속에 보낸 독감방,그것은 감방이라기보다는 살인지옥이였고 산 무덤이였다. 그 독감방은 파쑈독재《정권》들이 저지른 비인간적죄악을 고발하는 또 하나의 증거물이다.
가장 야만적인 고문학살만행
사회적존재인 사람은 누구를 막론하고 존엄과 생명,신체에 대한 불가침의 권리를 가진다. 그러나 남조선의 력대 파쑈통치배들은 사상과 리념이 다르다고 하여 우리 비전향자들을 마구 처형하였으며 사상전향을 하지 않는다고 하여 고문학살하였다.
내(고광인)가 수감되여있던 전주형무소는 좌익수,비전향자들에 대한 참혹한 학살로 소문난 곳이다. 1950년 7월중순 이 형무소의 교형리들은 인민군대의 반공격으로 패주하게 되자 좌익수감자 수백명을 열다섯척의 높은 벽돌담장밑에 끌어내다가 괭이와 쇠스랑으로 마구 찍어죽였다. 또한 간수들이 두줄로 늘어서서 그 사이를 지나가는 좌익수감자들을 몽둥이로 때려죽였다. 그때 어찌나 사람들이 많이 죽어나가는지 하루밤 자고나면 시체더미가 생겨났을 정도였다.
1950년대 우리 비전향자들에게는 재판이 따로없었다. 내(김선명)가 직접 체험한바이지만 당시에는 체포된 사람들을 줄지어 세워놓고 앞줄 누구누구 이하 사형,뒤줄 누구누구 이하는 무기,그 뒤줄 누구누구 이하는 15년 징역 하고 선고하면 다였다. 그 무지막지하고 참담한 시절 얼마나 많은 비전향자들이 이름도 남김없이 형장의 이슬로 사라진지 모른다. 이로 하여 남조선의 모든 형무소들이 애국자들이 흘린 피로 차넘쳤다.
파쑈교형리들의 고문만행은 매우 잔인무도한것이였다. 특히 《유신정권》때 《전향공작전담반》의 교형리들은 우리들의 사상과 신념을 꺾기 위하여 가장 야만적인 방법을 총동원하였다.
손과 발을 같이 묶고 그 사이로 긴막대기를 들이밀어 공중에 매달아놓고 불로 지지면서 몽둥이로 마구 때리는 《통닭구이고문》,추운 겨울에 발가벗기고 수갑을 채운다음 꿇어앉히고 정수리에 얼음물을 한동이씩 쏟아붓는 《랭수고문》, 《코에 물넣기고문》,《물통에 머리 집어넣기 고문》,《비녀꽂기 고문》, 《비행기타기고문》,《급강하폭격고문》,《전기고문》 등 그 고문방법은 이루다 헤아릴수 없다.
1961년 6월 내(김석형)가 《중앙정보부》에 끌려다니며 취조받을 때 해방전 일제식민지통치시기 나를 고문한적 있는 김병길이라는자와 맞다들게 되였다. 전기고문기술자로 소문난 이자는 《요놈의 새끼, 잘 만났다. 어디 뜨거운 맛을 봐라》고 지껄이면서 전기줄 한 선은 나의 손에 묶고 다른 한선은 발에 묶어놓은 다음 전기를 투입하였다.
나는 저도 모르게 심한 경련으로 몸부림쳤다. 그래도 내가 전향하지 않자 이자는 잔인한 웃음을 띠우며 《씨까지 말려야 알겠는가》고 하면서 이번에는 전기줄의 한선을 나의 오른손에 련결하고 다른 한 선은 국부에 련결하여 전기를 다시 투입하였다. 나는 전신에서 불찌가 튀여나가는것을 느끼며 그만에야 정신을 잃고말았다.
나(우용각) 역시 남조선에서 철창속에 갇혀있을 때 전향을 하지 않는다고 하여 야만적인 고문을 당하였다. 대전《교도소》와 광주《교도소》,전주《교도소》 등에 끌려다니면서 나는 파쑈교형리들에 의하여 《통닭구이고문》과 《물고문》 그리고 방바닥에 쓰러뜨리고 온몸을 여러겹으로 꼰 바줄로 콩 타작하듯 내리치는 《타작고문》, 손발을 등뒤로 결박하고 목고채를 목덜미에 끼워넣고 비트는 고문 등 별의별 고문을 다 당하였다. 그로 하여 무릎관절과 어깨뼈가 탈골되고 왼쪽 옆구리 갈비뼈가 전부 부러졌으며 목뼈까지 크게 상한데다가 륵막염에 걸려 온몸이 만신창이 되여버렸다. 그때 나에 대해 악착하게 고문을 들이대던 대전《교도소》의 《전향공작전담반》 반장 유종흠과 《교회관》 라석규,《교회사》 신하균 그리고 광주《교도소》의 《전향공작전담반》 반장 문승호,《교회사》 리규연,최한주 등 파쑈교형리들의 잔인하고 험상스러운 몰골은 지금도 저승사자처럼 눈앞에 스산하게 떠오르군 한다.
살인악마들의 야수적인 고문의 어혈로 공화국의 품에 안겨 행복한 삶을 얼마 누리지 못하고 우리곁을 떠난 비전향장기수 신인영은 생전에 자기가 당한 고문만행에 대해 이렇게 썼다.
《<전향하겠어? 안하겠어?>. <그걸 말이라고 하나, 세상이 두쪽나도 전향을 안하니 포기해라>. 그러자 떡봉이 셋이 달라붙어 나를 바줄로 묶고는 얼굴에 물수건을 덮었다. <야 고추가루 탔어?>.<탔어> 숨이 꺽꺽 막혀 내가 몸을 움직이자 한놈이 내 얼굴을 치며 소리쳤다. <가만있어 빨리 고추가루물을 부어!>.세상에서 가장 참을수 없는 일의 하나가 코와 입을 통해 고추가루를 탄 물이 그냥 배속으로 들어가는것이다. 숨을 쉴수가 없어 그저 붓는대로 물이 들어가는것이다. <커억,쿨럭! >.<계속 부어>. 고통으로 몸부림치는 나를 붙잡고 계속 물을 붓는다. 의식이 혼미해지고 어느새 기절한다. 그놈들이 다시 발로 배를 걷어찬다. 물을 다 게우면 또다시 고추가루물을 부어댄다.》
《전향공작전담반》의 교형리들은 고문만행에 살인강도질을 일삼다가 잡혀온 폭력범들까지 동원하였다. 내(조창손)가 대전《교도소》에 수감되여있을 때인 1973년 여름 어느날 폭력배들이 《특별사동》의 복도를 지나가다가 나를 향해 《야, 11방, 전향 안해?》라고 소리를 치는것이였다. 《나? 나는 전향 안한다.》하고 말하자 폭력배들은 《뭐, 너 여기 나와, 이런 쌍놈의 새끼가 다 있어.》하고 지껄이면서 나를 끌어내여 지하고문실로 끌고갔다. 그리고는 천정에 꺼꾸로 매달고 《물고문》,《불고문》 등을 가하면서 무려 8시간동안이나 몽둥이로 무지막지하게 때리고 발로 차고 짓밟아댔다. 그리하여 나는 머리가 터지고 턱이 삐여지고 입이 째진 처참한 상태에서 의식을 잃은채 반죽음이 되여버리고 말았다.
파쑈악당들의 야만적인 고문만행으로 수많은 비전향자들이 참혹하게 학살당하였다. 대전《교도소》에 있던 비전향자 리선우도 아침 일찍 끌려나가 캄캄한 밤이 되여 시체가 되여 돌아왔는데 그의 온몸은 고문으로 시꺼멓게 멍들어 있었다.
교형리들은 비인간적고문과 학대에 단식으로 항거하는 비전향자들에 대해서는 《강제급식》이라는 고문도 들이대였다. 《강제급식》은 간수 여럿이 달려들어 단식하는 사람을 콩크리트바닥에 쓰러뜨려놓고는 강제로 입을 벌리고 고무호스로 펄펄 끓는 뜨물같은 멀건 죽물이나 굵은 소금이 채 풀리지 않은 차디찬 소금물을 마구 목구멍으로 들이미는 고문이였다. 이 무지막지한 《강제급식》고문으로 음식물이 식도가 아니라 기관지나 기도로 들어가 죽은 사람이 부지기수이다.
1980년 7월 나(리종)를 비롯한 청주《보안감호소》에 감금된 우리 비전향자들은 야만적인 고문학살만행에 항거하여 집단항의단식을 한적이 있었다. 집단단식에 들어간지 나흘째되는 날 우리는 《강제급식》고문장으로 끌려갔다. 《강제급식》고문장은 우리 먼저 고문을 당한 사람들의 배설물과 구토물로 질벅하였다. 그 질펀한 바닥에 꿇어앉히우다가 나는 주춤하고말았다. 왼쪽 콩크리트바닥에 김용성이 포승에 꽁꽁 묶인채로 비스듬히 쓰러져 운명해가고있는것이 보였기때문이였다. 그의 동공은 이미 확산되여 어디를 보는지 알수 없었고 반쯤 벌어진 입에서는 거품이 흘러내리고있었다. 그날 《강제급식》고문만행으로 김용성,변형만 두 비전향자가 무참히 목숨을 잃었다.
파쑈악당들이 우리들에게 가한 야수적인 고문만행을 꼽자면 끝이 없다. 비전향자 리용운과 황필구처럼 야수적인 고문과 비인간적인 학대에 견디지 못하여 스스로 목숨을 끊는 사람들도 적지 않았다. 인간이기를 그만둔 이 야수들의 잔악무도한 고문만행으로 말미암아 수많은 비전향자들이 처참하게 학살되였다.
교형리들은 우리 비전향자들을 무참히 고문학살하고는 저들의 비인간적만행이 세상에 드러나는것이 두려워 그것을 《자살》로 꾸며놓기도 하였다. 대전《교도소》의 《최석기,박융서 고문치사사건》은 그 하나의 실례이다. 《전향공작전담반》의 교형리들은 1974년 4월 최석기가 사상전향을 하지 않는다고 하여 그를 처참하게 때려죽이고는 목을 매여 《자살》한것처럼 처리하였으며 같은 해 7월 간수 김진태,깡패 리돈욱 등은 비전향자 박융서를 몽둥이로 때리고 바늘묶음으로 온몸을 찌르고 나중에는 인두로 지지면서 모진 고문을 가하던 끝에 잔인하게 살해하고는 그의 배와 목을 유리로 마구 란탕쳐놓고 《자살》로 꾸며놓는 치떨리는 만행을 감행하였다.
파쑈악당들은 고문과 학살로 비전향자들을 굴복시킬수 없게 되자 고문끝에 의식을 잃은 사람들을 강제로 《전향》의 손도장을 찍게 하거나 고문으로 학살당한 사람을 《전향자》로 만드는 모략도 꺼리낌없이 감행하였다. 당시 광주《교도소》뿐아니라 대전,전주를 비롯하여 남조선 각지에 널려진 《교도소》들에서도 이러한 방법으로 《정치범전향 실적올리기》가 대대적으로 벌어졌다. 이 강제전향책동으로 하여 적지 않은 비전향자들이 《전향자》의 루명을 쓰게 되였으며 살아남은 사람들에 대하여서는 《전향》이라는 구실로 오늘까지 공화국의 품으로 돌려보내지 않고있다.
파쑈교형리들은 우리들을 사상전향시키기 위하여 회유기만책동에도 집요하게 매달렸다. 그들은 야수적인 고문만행의 후과로 중병을 만나 생사기로에서 헤매이고있는 비전향자들에게 전향을 하면 약도 주고 치료도 해주겠다고 하면서 얼림수를 썼으며 그 말을 듣지 않으면 아무렇게나 내팽개쳐 죽게 하였다.
1973년 9월 경 나(박완규)는 고문후유증으로 호흡장애가 심해지고 고열이 나면서 운신할수 없게 되였다. 의무과장이라는 자가 와서 진찰했는데 급성페염에 륵막염이라는것이였다.
이자는 치료를 안하면 사망한다고 하면서 《중환자이기에 병사에 입병시켜야 하겠으나 전향하지 않아서 안된다. 전향만 하라. 그러면 항생제주사도 놔주고 치료도 해주겠다.》고 하였다. 나는 격분하여 그자를 내쫓아버렸다. 결국 병치료를 받지 못하여 사경에서 헤매이다가 겨우 살아남게 되였다.
비전향자 최재필은 오랜 기간의 감옥살이와 고문만행으로 몸이 쇠약해질대로 쇠약해진데다가 위암까지 걸렸다. 교형리들은 《전향해야 수술해주겠다》고 하면서 그를 병사에 보내는것을 거절하였다. 우리들이 《환자를 놓고 흥정하느냐, 당장 입원시켜라.》고 하면서 강력히 들이대자 교형리들은 그를 병사에 데리고 가는척 하고는 병사 2층에 있는 문둥병원에 처박아두었다. 결국 그는 치료도 받아보지 못하고 고통속에 운명하였다. 비전향자 유재현도 고문의 후과로 페병을 몹시 앓았다. 교형리들은 그에게 병을 고쳐주겠으니 《전향서》를 쓰라고 하면서 그러면 마산병원에 입원시켜 치료해주겠다고 하였다. 그가 끝까지 전향하지 않고 뻗치자 교형리들은 약조차 주지 않아 결국 그는 감옥에서 페결핵으로 사망하였다.
파쑈교형리들은 사상전향공작에 가족들까지 내모는 비렬한 행위도 서슴지 않았다. 내(양정호)가 대전《교도소》에 수감되여있을 때 어느날 교형리들은 나를 사상전향시켜보려고 여든이 넘은 어머니를 끌어왔다. 백발이 성성한 어머니가 자식앞에서 눈물을 흘리는 모습을 볼 때 나는 그야말로 죽고싶을 정도로 괴로웠다. 그때 나는 부모와 자식간의 혈육의 정까지 전향공작에 리용하는 파쑈통치배들에 대한 증오로 치를 떨었다. 공화국의 품에 안긴후 야만적인 고문후과로 사망한 비전향장기수 신인영의 경우도 교형리들이 그의 8형제를 모두 끌어내여 전향공작에 내몰았으며 그들이 잘 동원되지 않는다고 모진 고문을 가하여 동생은 허리까지 다쳐 고생하게 하였다.
우리 비전향장기수들이 만기 출소한후에도 본인은 물론 가족들도 거주와 직업,생업,려행 등에서 계속 커다란 박해를 받으면서 인권을 처참하게 유린당하였다.
실로 우리 비전향장기수들의 사상과 신념을 꺾기 위하여 남조선파쑈통치배들이 저지른 악행은 이루다 말할수 없다.
극악무도한 고문학살만행과 온갖 비인간적학대로 우리 비전향장기수들의 존엄을 유린하고 생명을 빼앗았으며 신체를 마구 짓밟은 남조선의 력대 파쑈통치배들의 죄행은 그 하나하나가 천추에 용납못할 가장 야만적인 특대형 반인권범죄이다.
처벌하고 사죄,보상해야 한다
남조선에서 수십년간 철창속에 갇혀 인간의 상상을 초월하는 온갖 고통을 받아온 우리 비전향장기수들은 력사적인 6.15공동선언이 열어준 길을 따라 2000년 9월 저주로운 남조선땅을 떠나 원한의 분계선을 넘어 그립고 그립던 공화국의 품에 안기게 되였다. 공화국은 우리들을 사상과 신념의 강자로 내세워주고 영광과 행복의 최절정에 올려앉혀주었다. 지금 우리들은 특별한 배려속에 건강을 회복하고 참다운 새 삶을 마음껏 향유하고있다.
판문점분리선을 넘어서던 그때까지만 해도 남조선파쑈통치배들의 야수적인 고문만행의 후과로 말미암아 모두가 페인이 되고 불구가 되여 누구도 제발로 변변히 걷지 못했던 우리들이였다. 뼈만 앙상하게 남고 몸도 제대로 가누지 못하여 담가에 실리거나 밀차에 몸을 맡기고 링게르를 매단채 분계선을 넘는 우리 일행, 그나마 남녘 산하에 숱한 동지들을 묻고 63명만이 간신히 살아남아 분계선을 넘게 되였으니 이런 수난자의 행렬이 어디에 있겠는가.
지난 시기 유럽의 한 작가는 14년간 억울하게 요새에 갇혀 수인생활을 한것을 인간이 겪을수 있는 가장 큰 고통과 불행으로 그려 이름을 날렸고 또 아프리카의 한 반인종주의투사는 27년간 감옥살이를 한것으로 하여 최장기수로 불리워져 내외의 동정과 조명을 받기도 하였다.
그러나 우리 비전향장기수들은 모두가 30~40여년,최고 45년의 감옥살이를 기록하고있다. 그것도 보통감옥이 아니라 오스벵찜수용소나 마이다네크수용소를 무색케 하는 최악의 중세기적인 지옥같은 살인감방에서 야만적인 고문까지 받으며 한생을 형언할수 없는 고통속에 보내야만 하였다. 여기에 철창밖에서의 감옥살이까지 합치면 수감년한은 반세기를 훨씬 넘는다.
우리 비전향장기수들은 남조선의 력대 파쑈통치배들에 의하여 존엄과 권리를 무참히 짓밟히고 헤아릴수 없는 불행과 고통을 강요당한 참혹한 수난자,피해자로서 응당 가해자들에 대한 처벌과 우리들이 입은 정신물질적피해에 대한 사죄와 보상을 요구할 권리를 가지고있다.
이것은 국제적으로 반인륜적,반인권적범죄는 시효에 관계없이 인류량심의 준엄한 심판의 대상으로 되고있고 범죄자가 피해자에게 보상을 하는것이 법적인 관행으로,보편적인 상식으로 되고있는 오늘의 현실에 비추어볼 때 너무도 응당한것이다.
제2차 세계대전시기 인류에게 극악한 만행을 저지른 나치스전범자들이 그때로부터 반세기이상의 세월이 흐른 지금에 와서까지 국제법정에 회부되여 인류의 준엄한 심판을 받고있는 사실을 보더라도 남조선의 파쑈교형리들은 력사의 심판을 피할수 없게 되여있다.
우리 비전향장기수들은 남조선의 력대 독재《정권》이 저지른 파쑈적만행을 정의와 량심을 짓밟는 불법무도한 범죄로,국제법적으로 공인된 인권을 란폭하게 유린하는 반인륜적,반인권적범죄로 규탄하면서 참혹한 희생을 강요당한 피해자로서 원고의 자격으로 가해자인 력대 파쑈독재《정권》과 그 후예들을 피고로 하여 다음과 같이 요구한다.
첫째, 사상과 신념을 버릴것을 강요하면서 우리 비전향장기수들에게 인간의 상상을 초월하는 악행을 저지른 파쑈독재《정권》시기의 주모자들과 교형리들 그리고 후예들을 모조리 력사와 민족의 심판대에 내세워 엄격히 처형하여야 한다.
지금 남조선에는 과거 파쑈독재《정권》의 괴수와 그 후예들과 그 시기 악명을 떨친 고문전문가,살인자들이 아직도 살아서 득실거리고있다. 그들은 과거범죄에 대하여 사죄하고 처벌을 받을 대신 옛 세상을 꿈꾸면서 독재《정권》을 복구해보려고 피눈이 되여 날뛰고있다.
이 추악한 반역의 무리들은 《정통성》이니,《시효》니 하면서 과거사청산투쟁을 정면으로 부정하는가 하면 파쑈독재《정권》시기의 피해자들을 모욕하다못해 비전향장기수들의 묘비까지 까버리는 반인륜적망동을 꺼리낌없이 감행해나서고있다.
이것은 대세의 흐름과 민심에 대한 엄중한 도전이고 과거 군사독재《정권》의 피해자들과 희생자들을 비롯하여 자주와 민주,통일을 위해 피흘려 싸워온 남조선인민들과 우리 비전향장기수들에 대한 참을수 없는 모독이다.
이러한 책동을 방임해둔다면 남조선이 중세기적인 암흑시대로 되돌아가게 될것이고 남조선인민들이 우리 비전향장기수들이 과거에 당한 그러한 피의 희생을 또다시 강요당할수 있다는것은 너무도 자명하다.
그러한 몸서리치는 처참한 과거가 되풀이되지 않게 하기 위하여서도 파쑈독재 족속들을 절대로 용서해서는 안된다.
남조선에서 과거 독재《정권》의 《법통》을 이어받은 조직적세력은 다름아닌 《한나라당》이다. 《한나라당》에는 독재《정권》의 잔당들과 후예들이 집결되여있다.
그러므로 《한나라당》을 피고석에 앉히고 심판대에 내세워야 한다. 《한나라당》은 남조선에서 애당초 정당으로 존재할 명분과 체면,도덕적가치를 상실한지 오래다. 《한나라당》과 같은 역적당, 파쑈독재당, 극악한 범죄당은 자주와 민주,통일이 대세의 흐름으로 되고있는 오늘 있을 자리가 없다.
따라서 《한나라당》은 당장 해체되여야 한다.
그리고 파쑈독재의 잔당들과 후예들,그에 가담하고 협력한자들을 용서없이 처벌하고 매장해버려야 한다.
둘째, 과거 독재《정권》이 우리 비전향장기수들에게 저지른 죄악을 사죄하고 피해보상을 하여야 한다.
우리 비전향장기수들이 남조선의 파쑈악당들에 의해 입은 정신적,물질적,육체적피해는 엄청나다. 우리 비전향장기수들은 사상과 량심을 버리지 않는다는 리유로 하여 30~40여년세월을 남조선의 철창속에 갇혀 인간의 모든것,인생의 전부를 빼앗겼다.
공화국의 품에 안긴 우리 비전향장기수 63명과 이미전에 귀환된 리인모가 남조선에서의 악몽같은 감옥살이로 하여 빼앗긴 인생년한을 모두 합치면 연 2,074년이나 된다.그로 입은 피해를 국제관례에 따라 우리의 관계전문가들이 초보적으로 계산한데 의하면 정신적피해를 제외하고 육체적피해만도 10억US$에 이른다. 여기에 감옥에서 학살당한 전체 비전향장기수들의 몫까지 고려하면 그 피해액은 최소한 수십억US$에 달한다.
우리 비전향장기수들은 감옥에서 당한 모진 고초와 그 후유증으로 인하여 지금도 고통을 겪고있으며 의료상,생활상 방조를 받고있다. 이것도 응당 보상되여야 할것이다.
과거 파쑈독재유산의 직접적상속자인 《한나라당》은 우리의 응당한 피해보상요구를 외면해서는 안될것이며 백번 사죄하고 철저히 보상한 다음 력사의 무대에서 영영 물러나야 할것이다.
력사의 심판은 엄격하며 자비를 모른다. 피묻은 죄행으로 하여 응당한 죽음을 당하고 무덤으로 간 《유신》독재자의 수치스러운 말로는 그것을 똑똑히 보여준다.
지금 《한나라당》은 바로 그 악명높은 《유신》독재자의 딸인 박근혜가 대표로 있다. 파쑈독재자의 더러운 피줄을 타고난것만 가지고서도 부끄러워하고 속죄해야 할 그가 자기의 추악한 처지도 모르고 도리여 머리를 꼿꼿이 쳐들면서 진보개혁세력들을 공격하며 지어는 감히 존엄높은 공화국을 걸고들면서 《인권》소동까지 벌리고있는것은 참으로 역겹고 격분할 일이다.
박근혜는 《유신》독재자의 딸로서 과거 《유신정권》을 적극 도와나선 죄행으로 보나 오늘 파쑈독재족속들의 집결처인 《한나라당》을 책임진 당사자로 보나 응당 첫번째로 피고석에 나앉아야 한다.
《한나라당》의 존재는 그 자체가 남조선인민들의 재난이고 불행이며 우리 민족의 수치이다.
우리는 세계의 공정한 여론과 국제기구들 그리고 과거청산을 위한 남조선의 관계당국과 관련단체들, 각계층 인민들이 우리의 정당한 목소리에 신중한 주목을 돌리고 《한나라당》을 해체하고 그 족속들을 처벌하며 피해보상을 할데 대한 요구에 적극 호응해나서리라는 기대를 표명한다.
주체95(2006)년 1월 6일
평양(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