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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동신문 《영원히 어버이수령님 그 품속에》-리종옥부주석의 생애
(평양 7월 15일발 조선중앙통신)15일부 《로동신문》은 《영원히 어버이수령님 그 품속에》라는 제목으로 된 글을 옹근 한면에 걸쳐 실었다.

그 전문은 다음과 같다.

우리 당이 걸어온 60년은 빈터에서 자립적민족경제를 일떠세운 조국번영기로 빛나며 사람들의 운명과 미래를 지켜주고 꽃피워주신 절세의 위인들의 인민사랑의 서사시와 더불어 가슴뜨거운 추억을 불러온다.

한때 동방의 《은둔국》으로 이름마저 사라졌던 조선이 어떻게 강도 일제와 침략자 미제를 때려부신 영웅의 나라로 되였으며 재가루만 날리던 페허에서 력사의 기적을 창조한 사회주의강국으로 찬연한 빛발을 뿌리고있는가.

식민지멍에를 들쓰고 살길을 찾아 모래알처럼 흩어지며 제 나라 말,제 이름조차 마음놓고 쓸수 없었던 사람들이 과연 언제부터 위대한 사상과 절대불변의 신념을 지닌 강철의 대오로 뭉쳐지고 집단적영웅주의의 긍지높은 모습으로 세상의 찬탄을 받게 되였는가.

김일성조선의 모든 영광과 행복을 안아오신 백두산위인들에 대한 다함없는 감사의 정으로 우리모두의 가슴은 끝없이 설레인다.

경애하는 장군님께서 《우리 당의 훌륭한 동지》,《관록있는 국가경제지도일군》이라고 값높이 불러주신 리종옥동지도 은혜로운 그 품에 안기였기에 부강조국의 년대기에 성장의 자욱을 남길수 있었다.

시련을 뚫고 사회주의강국으로

우리 나라에서 첫 인공지구위성이 성과적으로 발사되였다는 격동적인 소식은 온 민족에게 커다란 흥분과 자부심을 안겨주었다.

막강한 국력과 현대과학기술의 징표로 되는 인공지구위성 발사!

경애하는 장군님께서 내려보내주신 귀중한 문건을 통하여 이 소식에 접한 리종옥동지의 온몸은 하늘로 날아오르는듯 하였다.

풀무가 푸르닥닥거리며 호미나 낫가락같은 농쟁기나 벼리던 봉건의 질곡,기형적인 공업시설마저 일제가 패망하면서 야만적으로 파괴하여버린 식민지잔해들,새 조선건설의 벅찬 나날에 기초축성을 한 민족경제의 밑천이 미제가 일으킨 3년간의 전쟁으로 졸지에 재가루로 흩날리던 페허의 땅,미제와 반동들의 끈질긴 반공화국,반사회주의책동으로 걸음걸음 시련과 난관을 헤쳐온 나라.

남들이 도저히 상상할수 없는 사변이 20세기말에 이르러 사회주의조선에서 터졌으니 과연 이 경사를 무슨 말로 표현하랴.

한생 과학기술령역에서,국가경제분야에서 땀흘려온 리종옥동지였지만 이때는 심장에서 피가 솟구치여 무딘 붓끝이나마 고르지 않을수 없었다.

장하고나 조선아
위대하다 조국아
만고절세 위인을
높이높이 모시여
너의 기상 네 모습
세상천지 한끝에
떨쳐지고 빛나네

리종옥동지는 인생말년에 백두산위인들께서 당 및 국가건설,경제 및 과학기술분야에 쌓아올리신 불멸의 업적과 고매한 덕망에 대한 생동한 자료들로 근 10권에 달하는 부피두터운 책을 썼으나 매번 미숙한 필력이 그 높은 경지에 닿지 못하여 애를 태웠다.

돌이켜보면 어버이수령님과 경애하는 장군님께서 이 땅에 얼마나 위대한 세기적전변을 안아오시였는가.

북조선림시인민위원회의 첫 의정에 따라 만들어진 그 연필로 공부를 시작한 학생이 아버지가 되였을 때 우리 나라에는 수백개의 대학이 문을 열었다. 우리 수령님께 분여받은 땅에서 난 첫 햇곡식을 이고 감사의 인사를 올리러 왔던 강원도의 한 농촌녀인이 문맹퇴치를 하고 협동농장 관리위원장,최고인민회의 대의원으로 활동하던 때에 우리 나라에서 온 사회의 인테리화강령이 선포되였다.

일제통치말기 우리 인민에게 차례진 천이 인구 1인당 14㎝,그때는 천이 얼마나 귀했던지 리종옥동지의 일가친척들중에도 토스레옷을 부자간이 같이 걸치던 집이 여럿이 있었다. 위대한 수령님의 웅대한 구상에 따라 온 나라 이르는 곳마다에 방직공장들이 숲을 이루어 한해에 10여억m의 직물이 생산되고 비날론,모비론,아닐론이 폭포쳐흐를 때 리종옥동지는 얼마나 감격해하였던가.

어버이수령님께서 언제인가 성진제강소를 찾으시였을 때 나막신(나무로 만든 신)을 신고 일하는 용해공을 보시며 너무 가슴아프시여 리종옥동지에게 우리 빨리 신발공장을 지어 누구나 가죽구두를 신게 하자고 하시였는데 그때로부터 줄줄이 건설된 신발공장이 지금은 도처에 있다. …

크지 않은 국토면적에 현대적인 공장,기업소들이 꽉 들어앉아있고 마음만 먹으면 그 무엇이든지 만들어내며 미제의 끈질긴 고립압살책동도 단호히 짓부셔버리는 력사의 기적을 창조하신 백두산위인들의 그 불멸의 업적을 어찌 몇권의 책들에 다 그려낼수 있으랴.

전쟁이 끝난 이듬해 여름 경애하는 장군님께서 현지지도의 길에 계시는 위대한 수령님을 모시고 함경북도에 가시였을 때의 일이였다.

라진,선봉으로부터 5호대지에 이르기까지 북변의 여러 고장을 찾으시여 공장,기업소들과 농어촌들의 사업을 현지지도하신 후 다시 청진으로 오신 수령님께서는 숙소로 정하신 렬차집무실에서 도당열성자회의를 준비하고계시였다. 그이께서는 리종옥동지와 정준택동지를 급히 부르시였다. 그이의 집무탁에는 신문지 한장만한 지도가 놓여있었다. 여러가지 그림과 부호들이 그려져있는 지도에는 수령님의 현지지도로정과 함께 앞으로 개건확장되거나 새로 건설될 제철소와 제강소,발전소와 조선소,탄광과 광산,방직공장 등 중요공장,기업소들은 물론 수산사업소와 농목장들 그리고 대상들의 조업날자와 생산능력까지 기입되여있었다. 한참이나 지도를 뜯어보던 리종옥동지는 그 지도가 경애하는 장군님께서 그리신것임을 알아보고 탄복을 금치 못하였다.

10대초의 우리 장군님의 비범한 통찰력과 분석력,천리혜안의 예지가 응축된 한장의 지도!

그것은 말그대로 우리 공화국의 찬란한 미래가 비낀 웅대한 설계도였다.

정준택동지도 탄성을 올리였다.

어버이수령님께서는 이 지도에는 그동안 자신께서 도에 와서 준 당면과업들과 전망목표들이 한눈에 안겨오게 다 그려져있소라고 하시며 매우 만족해하시였다. 어버이수령님을 우러르는 경애하는 장군님의 만면에도 해빛같은 미소가 어리였었다.

그때로부터 리종옥동지는 두분의 불세출의 위인들께서 얼마나 위대하고 거창한 창조와 변혁의 현실을 펼치시는가를 걸음걸음 목격해왔다.

력사적인 조선로동당 제6차대회를 앞두고 우리 경제가 또 한번 용을 쓰던 때에 리종옥동지는 경애하는 김정일동지의 비범한 령도력과 천리혜안의 예지에 더욱 탄복하게 되였다.

사회주의대진군의 불길이 세차게 타번져 그해 상반년도계획수행에서 전례없는 일대 혁신이 창조되고있던 때였다. 위대한 장군님께서는 리종옥총리를 찾으시여 요즘속도로 나가면 년간 인민경제계획을 당대회전으로 끝낼수 있겠는가고 물으시였다. 리종옥동지는 인차 대답을 드리지 못하였다. 년간계획을 두달이상 앞당겨 끝내는것은 간단한 문제가 아니였던것이다.

한동안 사색에 잠겨계시던 위대한 장군님께서는 아무래도 지금속도로는 당대회전으로 년간계획을 완수할수 없다고 하시며 단호하게 말씀하시였다.

《당 제6차대회를 앞두고 100일전투를 벌려야 하겠습니다.》

100일전투!

앞이 탁 트이는 명안이였다. 위대한 장군님께서는 정무원사무국을 참모부로 하는 100일전투중앙지휘부를 꾸려주시였으며 전국각지의 각급 전투단위들에 1만 5천여명의 당,행정,근로단체일군들을 망라한 강력한 지도소조들을 파견하시였다. 또한 기술혁신돌격대,과학자돌격대들을 전투에 인입하고 3대혁명소조가 전투지도소조와 합심하여 100일전투를 힘있게 밀어주도록 당적조치를 취해주시였다.

온 나라의 모든 공장,기업소들이 일제히 총공격전에 진입하게 되였을 때 위대한 장군님께서는 리종옥총리를 또다시 찾으시여 조국해방전쟁시기 철령에 깃든 인민군수송전사들의 영웅적위훈에 대한 말씀을 하시였다.

그이께서는 이렇게 강조하시였다.

《철령을 넘나들던 인민군용사들이 지녔던 그런 강의한 의지와 필승의 신념만 가지면 점령 못할 고지란 없습니다.》

세월의 언덕을 넘으며 영웅전사들의 불굴의 넋을 전해주는 철령!

우리 장군님께서 리종옥동지에게 철령에 대한 말씀을 하신데는 깊은 의도가 있었다.

리종옥동지에게는 전화의 나날 철령을 넘던 잊지 못할 추억이 있었다. 미제의 발악적공세가 감행되던 1952년 2월 초였다.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전시인민소비품보장으로 분주히 뛰여다니던 리종옥동지를 찾으시여 인민대표단 단장으로 전선에 갔다오는것이 좋겠다고 하시였다. 리종옥동지는 적기가 밤낮없이 줄폭탄을 들붓는 철령을 넘게 되였다. 인민군수송전사들은 달도 없는 야밤에 포탄을 실은 자동차를 몰고 안변벌을 지나 신고산에 이르렀고 적들이 조명탄을 걸어놓고 기다리는 철령고개를 결사적으로 넘었다. 그는 근 두주간 1211고지를 비롯한 최전연을 돌아보며 군인들속에서 화약내를 맡게 되였다. 그 나날 리종옥동지는 전사들의 마라초담배맛도 보았고 포탄깍지로 만든 화선악기장단에 맞추어 그들과 어울려 춤도 추었으며 구수한 콩나물국의 진맛도 알게 되였다.

그것은 하나의 혁명대학을 속성으로 거치는 과정이나 다름없었다. 하루 3만여발의 포탄,폭탄이 작렬하는 속에서 싸우는 조선의 기상과 군인들의 총대정신,백절불굴의 투지를 심장에 새기는 과정에 비로소 그는 자신을 총탄이 비발치는 최전선에 파견하신 어버이수령님의 깊은 의도를 깨닫게 되였다. 그때로부터 근 30년이 흐른 때에 우리 장군님의 숭고한 뜻을 심장깊이 새기며 또다시 철령을 마음속으로 넘어보던 리종옥동지의 심중이 얼마나 뜨거웠으랴.

온 나라가 인민군용사들의 강의한 의지와 신념으로 용기백배한 그해의 100일전투는 승리적으로 결속되였으며 우리 인민은 긍지높이 당대회를 맞게 되였다.

영웅조선의 혁명적기상과 일심단결의 위력을 온 세상에 시위한 력사적인 조선로동당 제6차대회!

영광스러운 조선로동당을 창건하신 위대한 김일성동지와 우리 당의 영명한 령도자 김정일동지를 함께 모신 주석단에 서있는 리종옥동지의 심장은 이런 웨침을 터치고있었다.

(대를 이은 수령복으로 위대한 당은 온 누리에 영광떨치고 어머니조국은 찬란한 미래를 맞습니다!)

걸음걸음 손잡아 이끌어주시여

내 나라,내 조국의 부강번영의 년대기는 백두산위인들의 손길따라 우리 일군들이 걸음걸음 자라온 보람찬 성장기로 빛나고있다.

누구나 두번다시 태여나 백번 안긴다 해도 변함이 없고 차별을 모르는 사려깊은 어버이의 그 품에서 식민지인테리였던 리종옥동지도 광복후 공장지배인으로부터 내각참사,상,부수상,내각총리를 거쳐 국가부주석에 이르는 체계적인 성장의 길을 걸어왔다.

지금으로부터 21년전 최고인민회의 제7기 제3차회의에서였다.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회의안건이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부주석을 보선하는데로 넘어가게 되자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서시였다. 그이께서는 당중앙위원회 정치국회의에서 리종옥동지를 부주석으로 보선하기로 하였다고 말씀하시였다.

리종옥동지의 가슴은 끝없는 격정으로 세차게 설레이였다.

위대한 수령님의 그 믿음,그 은정이 너무도 뜨겁고 은혜로와 하염없이 솟구치는 눈물을 걷잡을수 없었다. 그날 밤 리종옥동지는 백두산위인들의 품에서 흘러온 잊지 못할 나날들이 되새겨져 잠못 이루었다.

리종옥동지가 어버이수령님의 부르심을 처음으로 받은것은 1947년 9월 하순 어느날이였다. 함경북도를 현지지도하시던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그날 일을 잘하는 청진방적공장(오늘의 청진화학섬유공장) 지배인이 마음고생을 한다는데 그와 점심이나 같이하자고 하시며 일군을 보내시였다. 차가 고말산등대앞에 멎었을 때였다. 어버이수령님께서는 바다가모래불로 엎어질듯 달려온 리종옥동지에게 《동무가 보고싶어 찾았소.》라고 하시며 손잡아 자리에로 이끄시였다. 오매에도 그리던 백두산청년장군의 각별한 사랑과 믿음에 접하게 된 그는 꿈같은 현실앞에서 몸둘바를 몰라하였다.

성진땅(오늘의 김책시)의 어느 막바지골짜기에서 빈농가의 맏아들로 태여나 더는 공부할수 없게 된 리종옥동지는 고학으로나마 청운의 뜻을 펴보려고 동북 만주의 교정들을 찾아 방황하다가 마침내 이국의 한 대학을 마칠수 있었다. 그에게 남다른 점이 있었다면 그것은 항일혁명의 불길이 세차게 타번지던 만주벌 눈보라를 맞으며 백두산청년장군에 대한 끝없는 경모심을 키워온것이였다. 광복후 성진시당 선전부장과 배영중학교 교무주임을 겸임할 때부터 그는 항일의 녀성영웅과 자제분에 대한 이야기를 많이 들어왔었다. 하지만 그가 백두산의 전설적령장들과 이렇듯 깊은 인연을 맺게 되리라고는 미처 생각지 못하고있었다.

어버이수령님께서는 그때를 이렇게 회억하시였다.

《김정숙동무가 그때 나에게 동무에 대한 이야기를 해주지 않았더라면 동무는 더 큰 고생을 하였을것입니다.》

광복직후 리종옥동지가 청진방적공장 초대지배인으로 된 때는 모든것이 걸리고 부족한 시기였다. 그는 일제기관에 복무한 한 오랜 인테리를 인입하여 끝내 공장을 복구하고 첫 인견사를 뽑았으며 그의 입당보증까지 서고 그를 기사장으로 추천하였다. 그런데 이 사실이 문제로 되였다. 도에 틀고앉은 좌경불순분자들은 불에 덴 송아지처럼 놀라 리종옥동지를 법기관에 넘기여 《공모결탁관계》를 대라고 강박하였던것이다.

당시 경성지방에 가계시던 김정숙동지께서 이 사실을 알게 되시였다. 그이께서는 조국에 개선하시여 청진에 계실 때 문전걸식하는 한 처녀의 운명을 구원해주신 일이 있었다. 후에 청진방적공장의 녀성일군으로 자란 그가 김정숙동지께서 경성에 오시였다는 소식을 듣고 한달음에 찾아갔다. 어머님께서는 눈물범벅이 된 그의 얼굴을 닦아주시며 그에게서 사람좋은 공장 지배인이 나쁜자들때문에 고초를 겪고있다는 이야기를 들으시였던것이다. …

이 사실을 뒤늦게야 알게 된 리종옥동지는 내각 경제참사로 평양에 올라왔을 때 첫걸음으로 김정숙동지를 찾아뵈옵고 감사의 인사를 드리였다. 김정숙동지께서는 남산재에 리종옥동지의 집을 몸소 잡아주시고 그의 안해 김금춘녀성이 철없는 두 어린것을 데리고 이사짐을 풀 때에는 만사를 미루시고 찾아오시여 집안팎을 돌아보시며 새살림을 보살펴주시였다. 그이께서 장마철걱정을 하시며 누구도 관심 못했던 수채통까지 고쳐놓게 하신 이야기는 잊지 못할 혁명설화로 세상에 전해지고있다.

어버이수령님께서 한평생 가장 기뻐하신 날들은 인재를 찾으신 때였다. 광복직후에는 더욱 그러하였다. 항일혁명투사들은 지방출장을 갔다와서 좋은 일군을 찾은데 대해 먼저 보고하군 하였다. 그이께서는리종옥동지에 대한 이야기를 자주 듣게 되시였다. 김책동지는 똑똑한 지식청년을 또 한명 찾아냈다고 보고했고 안길동지는 파악있는 기술자를 입당시켰다고 하였으며 오백룡,김려중동지들은 광복전후 그의 반일애국적활동에 대해 보증해나섰다.

당시 북반부에서 황해제철소,수풍발전소,흥남비료공장과 어깨를 겨루는 큰 공장이였던 청진방적공장의 지배인감을 물색하시던 어버이수령님께서는 김책동지에게 그 지식청년이 적임자일것 같다고 하시며 청진에 가면 리종옥동무의 사진을 찍어오라고 과업을 주시였다.

어느날 리종옥동지는 세번째로 공장을 찾아온 김책동지앞에 급히 나서게 되였다. 김책동지는 우리 기념사진이나 한장 찍자고 하며 넥타이도 바로 매주고 약간 들린 머리도 눌러주더니 함께 온 사진사에게 어서 찍으라고 손짓하는것이였다.

1950년대가 끝나가던 때 어버이수령님께서는 당시 국가계획위원회 위원장이였던 리종옥동지를 당중앙위원회 부위원장으로 내세워주시면서 이런 말씀을 하시였다.

《김책동무가 처음 동무를 만나보고와서 좋은 사람을 또 한명 찾았다고 그렇게 기뻐하던것을 나는 지금도 잊지 않고있습니다.
그때 김책동무와 함께 찍은 동무의 사진을 내가 가지고있습니다. 그래서 동무에 대한 인상을 더 좋게 가지고있었는데 그동안 실지 사업을 통하여 더 잘 알게 되였습니다.》

어버이수령님 품에 안긴 사람들은 이렇듯 하늘같은 믿음과 은정을 매일,매 시각 받아안으며 혁명정신으로 넋을 가다듬고 애국열로 심장을 불태우며 성장의 한길을 줄기차게 걸어왔다.

리종옥동지가 가렬처절한 전화의 나날 어버이수령님의 특별과업을 받고 산업성 전권대표로 서울에 나가 활동하면서 리승기박사를 비롯한 수백명의 과학자,기술자들을 수령님품에 안기게 한것도 리조실록구출작전을 성과적으로 결속할수 있은것도 어버이수령님의 그 고결한 인간애,조국애를 진심으로 받들었기때문이다.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가렬처절한 전화의 나날 천리혜안의 예지로 나라의 경제발전과 인민생활에서 중요한 의의를 가지는 경공업성을 조직하시였는데 그 첫 상으로 리종옥동지를 임명하시였다.

1952년도 다 저물던 때였다. 백전백승의 강철의 령장이신 김일성동지를 모시고 당시 내각청사 회의실에서는 그해 내각사업총화가 있었으며 뒤이어 설맞이오락회가 열리였다. 만면에 환한 미소를 담으신 수령님께서는 30대의 젊은 상인 리종옥동지를 먼저 지명하시였다. 그는 자리에서 일어섰으나 어쩔바를 몰라했다.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호탕하게 웃으시다가 동무는 연이 걸리면 연문제를 풀고 전선공급사업이 걸리면 그것도 잘 해제꼈지,올해 경공업계획도 빛나게 수행했는데 이제 노래계획을 미달해서야 되겠는가고 용기를 주시였다.

그 말씀에 담이 커진 그는 한때 강습소에 다니며 배운 《제일강산 우리 평양》을 소리높이 불렀다. 우리 수령님께서는 먼저 크게 박수를 쳐주시였다.

우리 당과 혁명,우리 국가와 경제가 멀리 전진하고 높이 발전해온 거창한 변혁의 년대들에 희세의 위인들께서 리종옥동지를 키우시고 아끼시던 이야기가 그 얼마인지 모른다.

우리는 여기에서 그 수많은 일화들중의 일부만을 전하게 된다.

1970년 여름 리종옥동지는 며칠동안 진행된 당중앙위원회 전원회의에서 비판을 받은 일이 있었다. 비판된 내용들은 심각하고 엄중한것이였다. 그가 며칠동안 밤새워 비판준비를 했으나 그것은 회의참가자들의 공감을 받지 못했다. 당황해난 그는 과오의 본질과 사상적원인,앞으로의 결의 등을 납득이 되게 밝히지 못했다.

이때 리종옥동지보다 더 괴로와하신분이 어버이수령님이시였다.

회의가 끝난 후 복도로 나오신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그를 측은하게 바라보시다가 《토론준비를 잘하라고 그렇게도 말했는데 고작 그게 다요?》라고 하시며 몹시 섭섭해하시였다.

그가 기여들어가는 소리로 《면목이 없게 되였습니다.》라고 말씀드리자 그이께서는 면목이 문제인가,사람이 토론을 그렇게 하다니…라고 하시며 가슴아파하시였다.

전후 어느해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리종옥동지의 얼굴색이 밝지 못하였을 때에도 이런 말씀을 하시였다.

《일부 사람들이 동무에 대하여 이러쿵저러쿵 시비한다지?…
그 누가 무어라고 해도 나는 동무를 100% 믿소. 아니 200%,300% 믿소.》

친부모의 사랑도 미치지 못할 가장 고결한 동지적사랑의 세계를 개척하신 우리 수령님이시기에 그날 그리도 마음쓰시며 이윽토록 창가를 바라보시다가 엄한 목소리로 《인민경제대학에 가서 공부를 잘하시오.》라고 하시였다.

이렇게 되여 리종옥동지는 수십년만에 다시 교정을 밟게 되였다.

우리 수령님은 한없이 너그러우시면서도 자기 자리를 타고난 팔자처럼 여기는 일군,인민생활에 관심이 없는 일군,근로자들의 아픔에 대해 풀어주려고 하지 않는 일군에 대해 매우 엄격하시였다.

1982년 12월 중순 어느날 당중앙위원회 정치국회의를 소집하신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리종옥동지로부터 어느 한 광산실태를 보고받게 되시였다. 그 광산은 생산조건은 물론 로동자들의 생활환경이 좋지 못하였다.

이 사실을 알게 되신 어버이수령님께서는 리종옥동지를 엄하게 바라보시면서 동무는 광복직후부터 나와 함께 일해오지 않았는가,동무가 로동자들이 어렵고 힘든 일을 하고있는데도 아랑곳하지 않고있으니 리해할수 없다고 준절하게 질책하시였다.

그이께서는 이런 교훈적인 말씀을 하시였다.

사상투쟁을 벌리고 비판을 하는것은 부모들이 자식의 때를 씻어주는것이나 같다. 부모가 철없는 자식들이 때를 씻지 않겠다고 하면 억지로 씻어주듯이 일군들이 나쁜 구렁텅이에 빠지지 않게 하려면 좀 싫어하더라도 자주 비판하여 머리에 쓴 《녹》을 벗겨주어야 한다. …

어버이수령님께서는 일군들을 우리 당의 혁명사상과 절대불변의 신념과 의지로 튼튼히 무장시키기 위해 한평생 마음쓰시였다.

광복직후부터 반세기이상 국가경제지도일군으로 일해온 리종옥동지의 경력에는 짧은 기간이나마 당중앙위원회에서 부장사업을 한 때도 있었다. 사실 그것은 그에게 당사업능력이나 당사업경험이 있어서도 아니고 그 자리에 그가 꼭 필요해서 그런것만도 아니였다. 그것은 전적으로 위대한 수령님께서 그가 어떤 과오라도 범할가봐 마음쓰시며 정치적시야를 넓히고 사람과의 사업을 배우도록 이끄신 은정깊은 조치였다.

어버이수령님께서 리종옥동지의 인간미를 다듬어주신 이야기도 있다.

언제인가 그가 함경남도에 나가있을 때 아버지의 돌제사가 다가오고있었다. 그는 국사가 중한 때 개인사정을 앞세우는것 같아 그리 멀지도 않은 아버지의 산소를 찾을 용단을 못내리고있었다.

이러한 때 어버이수령님께서 리종옥동지를 전화로 찾으시여 서운한 기색으로 지난해 아버지가 사망했을 때 왜 자신께 보고하지 않았는가고 나무람하시였다. 그러시면서 세상에 부모없이 태여난 자식이 어데 있는가,아버지가 사망했을 때에도 가보지 않고 돌제사에도 가지 않고 일하는 사람이 무슨 혁명가인가,그런것이 혁명성이 아니다,우리 간부들이 사업에만 열중하고 가정에 관심을 돌리지 않는다면 간부가 되니 부모도 몰라본다고 인민들이 욕을 한다고 하시였다. 잘못을 깨닫고 그가 집을 찾아가니 수령님께서 파견하신 일군이 먼저 도착하여 제상을 차려놓고 그를 기다리고있었다. …

어버이수령님께서 마련해주신 자신의 생일상앞에 뜻밖에 마주앉으며 그가 눈굽을 적신적이 한두번이 아니였다.

어버이수령님께서 늘 곁에 두신 두가지 《문건》이 있었는데 그 하나가 바로 일군들의 《생일명단》이며 다른 하나는 그들을 계획적으로 휴식시키기 위한 《휴가명단》이였다. 그이께서는 언제나 년초에 일군들의 생일을 월,일순차로 적으신 명단을 손수 만드시여 한통은 자신의 집무실책상우에,다른 한통은 관계부문 일군에게 주시여 일군들의 생일을 잊지 않고계시였다.

전사들과 동지들에 대한 사랑을 천품으로 지니신 수령님이시기에 환갑도 되기 전에 세상을 떠난 오랜 지식인출신일군의 환갑상도 사후에 차려주게 하시고 천리마제강련합기업소에서 고문으로 일하는 한 일군의 생일을 30년동안 기억하고계시다가 그날에 환갑상을 보내주기도 하시였다.

김구,허헌,홍명희,강량욱 등 애국인사들과 일군들이 생일상앞에서 격정을 터치는 모습을 보면서 리종옥동지는 정말 우리 수령님 같으신 성인은 이 세상에 더는 없다고 탄복해마지않았다.

전사들을 아끼고 내세워주시는 어버이수령님의 인간사랑의 세계는 이렇듯 우주같고 그 정은 불보다 더 뜨겁다.

지난날 일제와 착취계급에게 복무하면서 굴종과 치욕을 강요당하던 정준택,강영창,김두삼,로태석,최성세,원홍구,계응상 등 오랜 인테리들의 인생회고담을 펼치면 그것은 또 그대로 눈물나는것이여서 사람들모두가 오늘도 꿈결에도 그리운 수령님품을 찾고 또 찾는것이다.

우리 당의 훌륭한 동지라고 하시며

경애하는 장군님은 오늘의 어버이수령님이시다. 그이의 눈빛,그이의 음성,그이의 손길,그이의 자욱자욱에서 사람들은 영원히 우리와 함께 계시는 어버이수령님의 거룩하신 모습을 피부로 절감한다.

경애하는 장군님을 모시고 어버이수령님의 령전에 피눈물을 쏟던 때로부터 리종옥동지는 다섯해가까이 그이를 우러르며 이 력사의 철리를 심장으로 느끼여왔다.

력사적인 최고인민회의 제10기 제1차회의를 앞둔 때인 일곱해전 가을 어느날이였다.

경애하는 장군님께서는 당중앙위원회 정치국회의에 참가한 리종옥동지에 대하여 이렇게 말씀하시였다.

《국가기구에서 중앙인민위원회를 없애고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회를 내오면서 지난 기간 당과 국가를 위하여 일을 많이 한 공로있는 일군들을 명예부위원장으로 두려고 합니다.
리종옥부주석동지가 명예부위원장직에서 일하도록 하려고 합니다.》

한 일군에게 있어서 희세의 위인들로부터 년대를 이어오며 비길데없는 은총을 끝없이 받아안는다는것은 행운중의 행운이 아닐수 없다. 그때 그의 나이가 82살이였다. 광복조국의 그날로부터 반세기이상 부어지던 어버이수령님의 그 사랑과 믿음이 우리 장군님에 의하여 더욱 뜨거워지고 깊어졌으니 인생고목에 어찌 꽃이 피지 않았으랴.

리종옥동지는 조선의 생명이며 혁명의 심장이며 승리의 기치이신 경애하는 김정일동지를 하늘처럼 높이 받들어모셔야 하겠다는 불같은 결의를 다지고 또 다지였다.

그는 당중앙위원회 정치국 위원으로서 두가지 무거운 혁명과업을 받고있었다. 그 하나는 경애하는 장군님께서 주신 어버이수령님을 잘 모실데 대한 과업이고 다른 하나는 수령님으로부터 받은 경애하는 장군님의 휴식을 잘 보장해드릴데 대한 간곡한 당부였다.

우리 인민과 진보적인류의 간절한 소망이 담긴 이 무거운 과업만은 제대로 수행 못하는것 같아 그는 늘 발편잠에 들지 못하였다.

경애하는 장군님께서는 1991년 10월 어버이수령님께서 중국방문의 길에 오르실 때 리종옥동지에게 수행일군의 영광을 안겨주시였다. 그때 수령님께서는 뜻깊은 당창건기념일을 남경의 동교초대소에서 맞게 되시였는데 점심시간 수행원모두를 자신의 곁으로 부르시였다.

그이께서는 만시름을 잊으시고 리종옥동지의 팔에 손을 얹으시더니 나를 생각해주는 김정일동지의 마음은 정말 지극하다고 뜨겁게 말씀하시였다.

가슴가득 격정이 차오른 리종옥동지는 《수령님,친애하는 지도자동지의 인품에는 우리 전사들이 백년 가도 따라갈것 같지 못합니다.》라고 말씀올렸다.

그날 저녁 숙소로 향한 차안에서 수령님께서는 리종옥동지에게 《우리가 언제 평양을 떠났더라?》라고 물으시였다. 그이께서 시간의 흐름을 짐작 못하시여 하신 말씀이 아니였다. 경애하는 장군님에 대한 그리움에서였다.

그이께서는 외국방문을 할 때마다 김정일동지에 대한 생각이 더 많이 난다고,자신께서 마음을 놓고 편안히 다른 나라를 방문할수 있는것도 김정일동지가 뒤에서 각별히 보살펴주기때문이라고 의미깊은 말씀을 하시였다.

세월이 흐를수록 어버이수령님만을 천세만세 높이 받들어모시려는 경애하는 장군님의 숭고한 도덕의리심이 더욱 세찬 불길로 타번지는 현실을 대하며 리종옥동지는 위대한 장군님을 더 잘 모시고 로고를 덜어드려야겠다는 각오를 다지군 하였다.

우리 수령님께서 어느 해변가를 거니시며 들려주시던 잊지 못할 이야기가 리종옥동지의 가슴에 깊이 새겨져있었다.

밤낮을 잊고 집무를 보시는 장군님의 건강이 걱정되시여 잠못 드시던 수령님께서 전화를 거신 일이 있었다. 그때가 새벽이 푸름푸름 밝아올무렵이였다. 수령님께서는 여느때와 달리 문득 지금이 몇시인가고 물으시였다. 시간을 말씀올리는 장군님의 음성을 귀전에 들으신 수령님께서는 잠시 생각하시다가 만류의 말씀대신 호탕하게 웃으시였다. 그러자 장군님께서는 수령님의 자애로운 웃음소리를 들으니 피곤이 다 풀립니다라고 기쁨에 넘쳐 대답드리시였다. 어버이수령님께서는 그후 우리 장군님께서 잠시라도 피곤을 풀고 명랑한 기분에서 일하시도록 해야 하겠다고 걱정하실 때마다 그러한 전화를 자주 거시였다고 한다. …

어버이수령님의 생전의 뜻을 받들어 리종옥동지는 경애하는 장군님의 휴식을 보장해드리려고 무진 애를 썼으나 그때마다 그것은 자신에게 차례진 《휴식처벌》로 끝나군 하였다.

리종옥동지가 너무 황송하여 사양할 때마다 그이께서는 《이것은 당의 결정입니다.》라고 하시며 그를 가족휴양지로 떠밀군 하시였다.

우리 장군님은 바로 이런분이시다. 그이께서는 자신에 대해서는 늘 잊으시고 수령님께서 아끼신 일군들에게 책임적인 일감을 맡겨주시고 또 휴식을 꼭꼭 보장해주시면서 《로당익장》하게 하시는 자애로운 어버이이시다.

경애하는 장군님께서는 올해 2월 10일 리종옥동지의 아들딸들이 삼가 올린 편지를 받아보시고 《리종옥동지는 위대한 수령님께 무한히 충실하였던 우리 당의 훌륭한 동지였습니다.》라는 친필을 남기시였다.

위대한 령도자를 모시면 조국도 끝없이 번영하며 전사의 삶도 영생의 언덕에서 빛나게 된다.

리종옥동지는 당의 대외정책관철과 공화국의 국제적권위를 높이기 위한 대외활동에서도 많은 공헌을 하였다. 그는 당과 혁명에 대한 끝없는 충실성과 조국과 인민에 대한 헌신적복무로 하여,불굴의 투쟁정신과 겸손하고 소박한 품성으로 하여 동지들과 인민들의 존경과 사랑을 받았다.

리종옥동지는 림종의 시각 인류가 맞이한 희세의 영걸이신 경애하는 김정일동지를 잘 받들라는 유언을 남기고 순직하였다.

세상에 우리 조국처럼 수령과 전사들사이에 혈연의 정이 끝없이 맺어지고 영원히 흐르는 나라는 없다.

어버이수령님께서 한평생 지론으로 삼으신 인민이 정녕 하늘이라면 그 하늘에 가득히 차넘치는것은 무엇인가.

그것은 김일성조선의 태양이신 경애하는 김정일동지를 영원토록 믿고 따를 수령님의 전사,제자들의 티없이 깨끗한 신념과 의리의 맹세이다.

우리의 태양은 찬란하다. 내 나라의 하늘은 영원히 푸르다.

창건 60돐을 맞는 어머니당,광복 60돐을 맞는 위대한 조국은 온 누리에 더욱 찬연히 빛날것이며 무궁토록 륭성번영할것이다.(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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