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양 2월 6일발 조선중앙통신)6일부 《로동신문》은 《백두산위인들의 숭고한 인간적의리,민족애》라는 제목으로 된 글을 2면의 옹근 한면에 걸쳐 실었다.
그 전문은 다음과 같다.
지난 1월 14일 재미교포로서 이국땅에서 생을 마친 손원태선생의 유해가 애국렬사릉에 안치되였다. 그는 조국의 광복과 통일성업을 위하여 견결히 싸운 혁명렬사도 아니고 나라의 안녕과 부강발전을 위하여 한몸바쳐 일한 특출한 공로자도 아니다. 가슴속 깊은 곳에 조국을 간직하고 사는 평범한 해외동포에 불과했던 그가 조국과 민족의 기억속에 영생하는 애국렬사들과 이름을 나란히 하게 된것은 그의 삶이 민족의 어버이이신 위대한 수령님과 경애하는 장군님의 한없이 숭고한 사랑과 고결한 인간적의리에 떠받들렸기때문이다.
손원태선생이 받아안은 사랑과 은정은 한번 동지적인연을 맺은 사람이라면 지구상 그 어디에 있건 따뜻이 품어주고 조국을 위하는 민족성원이라면 그가 누구든지 애국의 한길에서 영생하도록 손잡아 이끌어주시는 백두산위인들의 민족애가 얼마나 뜨겁고 고결한가를 보여주는 생동한 화폭으로 된다.
변함없이 동지로 믿어주시며
백두산위인들은 혁명의 수령,민족의 령도자이시기 전에 먼저 위대한 동지이시다. 하기에 생전에 어버이수령님의 품에는 자그마한 실개천들이 사품치는 대하에 모여들듯이 수많은 동지들이 찾아들어 안기군 하였다. 손원태선생도 어버이수령님을 그릴 때마다 먼저 자신을 《동지》로 불러주시던 수령님의 영상을 그려보군 하였다.
어버이수령님과 손원태선생의 동지적인연은 10대의 길림시절에 맺어졌고 그로부터 60여년이 지난 1990년대에 다시 뜨겁게 이어졌다.
손원태선생은 어버이수령님께서 자기를 다시 동지로 불러주신 생일 80돐때를 잊지 못해하군 하였다.
길림시절의 동지인 손원태선생을 80고령이 다 되여서야 만나시고는 너무도 기쁘시여 손원태는 길림시절의 자신의 딱친구였다고 하시면서 그날의 동지적우정을 잊지 못해하시며 그처럼 만족해하시던 어버이수령님,수령님께서 생애의 말년에 다시 만난 그에게 《동지》의 호칭을 다시 붙이신것이 세상에 알려진것은 그이께서 서거하신지 한달정도 지나서였다.
이날 한 일군이 어버이수령님께서 생전에 몸소 마련해주신 선물인 보석화 《송학도》를 전달하였다. 여덟마리의 학이 푸르싱싱한 소나무우에서 노니는 모습을 형상한 보석화의 밑에는 이런 글이 새겨져있었다.
《손원태동지의 생일 80돐을 기념하여
1994년 8월 11일
김일성》
이 선물은 어버이수령님께서 서거하시기 며칠전에 마련하신것이였다. 손원태선생은 그 고귀한 선물에 자기를 《동지》로 호칭하신것이 어버이수령님께서 주신 자신의 한생에 대한 가장 값높은 평가,가장 고귀한 표창으로 받아들여져 뜨거운 감격의 눈물을 흘리였다.
어버이수령님으로부터 《동지》라는 값높은 사랑을 받아안은 뜻깊은 날 손원태선생은 10대의 소년시절을 감회깊이 추억하였다.
손원태선생은 주체16(1927)년 4월 10일 길림교회당 앞마당에서 열리는 조선인길림소년회를 결성하는 모임에 참가하게 되였다.
개회사가 있고 연설들을 한 뒤에 소년회가 결성되였는데 사회자가 길림육문중학교의 김성주학생을 회장으로 추천한다고 말하였다.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연단에 나서시여 소년회조직의 취지와 임무,활동준칙 등을 간단히 개괄하시고나서 빼앗긴 나라를 되찾기 위하여 소년인 우리들도 헌신분투하자는 내용으로 짤막한 답사를 하시였다.
그날 그이께서는 손원태선생이 있는 쪽으로 돌아서시더니 소년들의 어깨너머로 손을 다정히 내미시며 《아,원태》하고 부르시는것이 아닌가. 손원태선생은 그이께서 자기 이름을 이미 알고계시는 사실을 놀라와하면서도 소년회 회장직을 맡은분이 알아주는것이 너무도 기뻐 어쩔줄을 몰라했다. 《아,원태》이렇게 친근하게 불러주신 위대한 수령님의 정어린 음성으로 그이와 손원태선생과의 첫 동지적우정이 시작되였다.
그 잊을수 없는 봄날은 참으로 손씨가문에 있어서 대를 두고 잊을수 없는 력사적인 날이였고 그날의 뜻깊은 상봉은 손원태선생의 성장과 전생애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치였다.
손정도목사가 길림시절의 위대한 수령님을 총애한것은 친지인 김형직선생님의 자제분이라는 점과 함께 위대한 수령님의 비범한 품격과 출중함에 마음이 끌리고 그이의 장래에 대한 남다른 기대와 관련되여있었다. 그런데로부터 그는 조선인길림소년회의 활동에 언제나 깊은 관심을 돌리고 그이를 적극 후원하였으며 위대한 수령님께서 일요일날 출연하는 강의에는 일부러 시간을 내여 참석하였고 소년회가 준비한 연예공연 같은것도 일일이 관람하군 하였다. 그때마다 손정도목사는 위대한 수령님께서 선견지명이 있는 사리정연한 견해와 뚜렷한 지론을 가지고있는데 대하여 놀라와하였고 그이의 조직자적수완과 소년들을 이끄는 능력,학문적조예가 깊으신데 대하여 늘 《<후생가외>라더니…》하며 감탄을 금치 못해하였다.
손원태선생의 어머니도 위대한 수령님에 대하여 매우 따뜻한 존경심을 품고있었다. 다감하시고 차근차근하신 그이께서는 손원태선생의 어머니와 세상돌아가는 형편이며 살림살이이야기도 곧잘하시였고 때로는 팔소매를 걷어붙이시고 어머니의 일손도 도와나서시였다. 그래서 그의 어머니는 속타는 일이 있으면 자식들보다도 위대한 수령님께 무랍없이 말씀드리군 하였다. 그러면 곧 어머니의 아픈 마음을 위로해주시고 힘을 내게 하시는 위대한 수령님이시였다.
길림시절에 손원태선생은 우리 수령님의 그런 천품에 부러움을 금치 못하였으며 언제나 그이를 친형으로,스승으로 존경하고 우러러따랐다.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소년회원들의 가슴속에 애국의 한마음과 빼앗긴 나라를 기어이 찾겠다는 각오를 깊이 심어주시기 위하여 여러가지 운동회와 등산,야유회 등을 조직하시고 소년회원들의 마음과 뜻을 하나로 합쳐주시였다.
추석을 앞둔 어느날 소년회원들이 길림시내에서 10여리 떨어진 교외의 룡담산으로 등산을 간적이 있었다. 땀을 철철 흘리며 산정에 오르니 때는 가을이여서 눈앞에는 누렇게 익은 곡식밭들과 금빛을 반사하는 송화강의 흐름이 굽어보였다. 그때 손원태선생은 깊은 생각에 잠기시여 송화강을 내려다보시던 위대한 수령님께 문득 고향이 어딘가고 물어보았다.
깊은 생각에 잠겨 송화강기슭을 바라보고계시던 수령님께서는 평양이라고 하시면서 《손목사님의 고향은 강서라지,강서는 평양에서 멀지 않은 곳이니 우리는 동향지인이라고 할수 있지.》라고 하시더니 고향 만경대에 대한 이야기를 하시였다.
소나무가 우거진 만경봉에 올라 내려다보면 발밑에 대동강의 흐름이 굽어보이는 만경대는 참으로 아름다운 고장이라고,이제 일본놈들을 내쫓고 나라가 독립되면 원태도 꼭 만경대에 놀러 오라고 정겹게 말씀하시던 위대한 수령님의 모습은 손원태선생의 뇌리에 새겨졌다. 언제 보아도 친혈육의 정으로 대해주시는 위대한 수령님의 인정에 이끌리여 그는 수령님을 무척 따랐다. 소년회원들이 《땅》과 《바다》 두편으로 갈라져 군사유희를 할 때마다 손원태선생은 막무가내로 우겨서라도 꼭 《땅》편의 대장이신 위대한 수령님의 편이 되군 하였고 수령님의 하숙집에도 곧잘 다니였다.
어느날 손원태선생은 동생 손인실과 함께 수령님께서 계시는 하숙집을 찾아갔다. 수학공부에 열중하고 계시던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그들을 반기시며 어서 들어오라고 이끄시였다. 깨끗이 꾸려진 그이의 검소한 방안에 들어선 손원태선생과 막내동생 손인실은 위대한 수령님의 공부를 방해한것이 죄송스러워 망설이며 돌아가려고 하였다. 그들의 마음을 알아보신듯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공부를 다했다고 하시며 밖에 나가 산보하자고 말씀하시였다.
그이의 말씀에 손원태선생과 손인실은 위대한 수령님과 함께 오래간만에 거리구경을 하게 되였다는 기쁨으로 하여 환성을 올렸다. 그들의 손을 꼭 잡으시고 거리로 나오시여 조용한 골목길에 들어서신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주머니에서 돈을 꺼내시여 중국민족음식인 《쨩즈궈즈》와 《빙땅흘루》를 사주시였다. 그이께서 사주신 《쨩즈궈즈》를 손에 들고 담벽에 기대여 옹송그리고앉아 맛있게 먹던 그때의 일을 손원태선생은 한생 기억속에 간직하고있었다.
그리하여 그는 후날 위대한 수령님께 드리는 편지에서도 이 사실을 감동적으로 썼고 수령님을 만난 자리에서도 60여년전의 그때처럼 응석담아 《쨩즈궈즈》를 다시 먹고싶다고,다시 사달라고 간청드렸던것이다. 그날 어버이수령님께서는 《사주지,다시한번…》이라고 하시고는 료리사들에게 만들도록 하시여 그에게 《쨩즈궈즈》와 《빙땅흘루》를 맛보게 하시였다.
손원태선생은 길림시절 위대한 수령님께서 들려주신 범을 이긴 소년에 대한 이야기를 늘 동료들에게 하군 하였다. 어버이수령님께서는 어느날 길림소년회원들과 함께 강남공원에 가시였다가 이런 옛말을 하시였다. 한 중이 어느 한 아이를 보고 15살이 되면 범에게 물려갈것이라고 하였다. 그러나 그 아이는 겁을 먹을대신 힘과 용기를 키워 범과 싸워이기고 범을 길들여 고향마을에 타고왔다는 이야기였다. 손원태선생은 위대한 수령님께서 이 이야기를 하신것은 소년들의 동심에 맞게 옛말형식으로 일제를 무서워하지 말고 제힘으로 거꾸러뜨려야 한다는것을 일깨워주시기 위해서였다고 회고하였다.
위대한 수령님께서 하신 물방울의 위력에 대한 이야기도 길림시절의 학생소년들에게 반일의식을 심어주는데서 커다란 작용을 하였다. 어느날 룡담산에 올랐을 때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손원태선생에게 크지 않은 돌로 썩바위를 쳐보라고 하시였다. 그가 썩바위를 내리치자 바위의 한 귀퉁이가 떨어져나갔다. 다른 소년들도 저저마다 승벽내기로 바위를 쳤는데 속이 궁근 썩바위는 쉽게 버그러졌다.
이때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무엇이 이 큰 바위를 궁근 썩바위로 만들었는지 아는가고 물으시였다. 누구도 대답하지 못하자 수령님께서는 물방울이다,너희들도 락수물이 떨어져 토방돌을 우묵하게 파헤치는것을 보았지라고 하시며 비방울이 수십수백년 떨어지고 또 떨어지면 굳은 바위도 부스러뜨린다고 알기 쉽게 이야기해주시였다. 그러시면서 우리도 물방울의 리치를 깨닫고 뜻과 힘을 한데 모아 꾸준히 싸워나간다면 아무리 강대한 일본이라도 쳐부시고 나라를 다시 찾을수 있다고 힘주어 말씀하시였다.
손원태선생은 혁명의 수령,위대한 동지로서의 어버이수령님을 회고할 때마다 혁명연극 《안중근 이등박문을 쏘다》를 보던 때를 생각하군 하였다. 당시 길림5중학교 강당에서 이 연극이 진행되였는데 그 인기가 대단하였다. 한번은 위대한 수령님께서 연극을 보고 돌아오는 손원태선생을 만나신적이 있었다. 그때 그이께서는 원태가 대단한 안중근숭배자라고 하시면서 물론 안중근은 애국자이고 영웅이다,그러나 그가 적용한 투쟁방법은 찬양할수 없다,개인테로로는 안된다고 말씀하시였다. 안중근을 존중하면서도 그의 투쟁방법을 부정하고 새로운 투쟁방법을 모색하시는 그이의 가르치심의 심오한 뜻을 손원태선생은 그이께서 항일무장투쟁을 전개하신 소식을 듣고서야 깨달았다. 손원태선생은 주체28(1939)년 어느날 상해신문 《대공보》에 실린 《김일성과 그의 항일투쟁》이라는 기사를 읽고 만주광야를 주름잡으며 일제와 싸우시는 김일성장군이 길림시절 반일교양을 하시고 안중근의 투쟁방법의 제한성을 깨우쳐주시던 김성주,그분이였구나 하는 생각으로 온밤 잠을 이루지 못했다. 서울에 살고있는 어머니를 찾아 상해를 떠나 조국으로 가던중 일본의 나가사끼에서 경찰에 붙잡혀 취조를 당할 때에도 그의 머리속에서는 길림시절 위대한 수령님의 모습이 자주 떠올랐다.
하기에 그는 1970년대에 남조선을 방문했을 때에도 군사파쑈독재자의 사촉을 받은 간악한 력사위조자들의 극악무도한 행위에 경악을 금치 못하며 김일성주석은 길림시절의 김성주분이시고 그분이 바로 민족의 암흑기에 수많은 전설을 남기신 민족의 영웅,조선의 애국자이신 김일성장군님이시라고 선포하였던것이다. 그가 간직한 이 동지적우정은 그로 하여금 생의 말년에 위대한 수령님의 품을 그리며 다시 찾게 하는 정신적원천으로 되였다. 그는 위대한 수령님의 동지애의 품에 안긴 다음 수령님의 위대성을 알리는 《선전부장》이 되겠다고 하면서 길림시절의 혁명조직성원으로 다시 되돌아가 참된 삶의 길을 꿋꿋이 걸어나갔다.
정녕 어버이수령님의 품은 10대에 동지적관계를 맺었던 사람들도 한평생을 이국땅에서 살다가도 다시 찾아와 안기는 위대한 동지애의 품,자애로운 어버이의 품이였다.
친구,스승,수령의 모습
손원태선생은 생전에 어버이수령님과 끊을수 없는 혈연의 정을 맺었다. 그가 우러른 위대한 주석님의 모습은 친구,스승,수령의 모습이였다고 그는 늘 말하군 하였다. 그의 이 말은 김일성주석님은 위대한 인간이신 동시에 자애로운 스승,경애하는 수령이시라는 그의 인생총화의 토로라고 말할수 있다.
손원태선생을 막역지우로 보시고 자별한 인간관계를 맺으시는 어버이수령님의 숭고한 모습은 그의 첫 상봉에 집약적으로 비껴있다. 주체80(1991)년 5월 어느날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손원태선생을 만나시고 그를 찬찬히 바라보시다가 우렁우렁하신 목소리로 말씀하시였다.
《아,원태! 얼굴이 생각나.》
순간 손원태선생은 위대한 수령님을 향해 어푸러지듯 달려갔다. 두팔벌려 넓으신 품에 꼭 안아주시며 어디에 가있다가 이제야 왔는가고 하시는 어버이수령님의 물으심에 손원태선생은 아무런 대답도 올리지 못하고 눈물만 흘리였다. 그러자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감격의 눈물이 하염없이 흘러내리는 그의 얼굴을 감싸쥐시고 정답게 들여다보시였다. 그러시다가 어떻게 되여 이렇게 머리가 세여졌는가고 다정하게 물으시였다. 그제야 손원태선생은 마치 어제날 길림시절에로 되돌아간듯 한 약간 응석기가 섞인 목소리로 《주석님과 헤여진 다음 줄곧 주석님생각을 하다보니 그렇게 되였습니다.》라고 말씀올리였다. 60여년전의 일을 잊지 않으시고 그토록 뜨겁게 추억해주시는 위대한 수령님의 모습을 우러르면서 손원태선생은 너무도 옹졸했던 자신을 돌이켜보았다.
그는 평양방문초청을 받고 여러가지 생각에 잠기였다.
김일성주석께서 나를 알아보실가,또 정사에 바쁘신 그분께서 과연 시간을 내시여 나를 만나주시겠는지 그리고 그곳 인민들은 적국의 시민인 나를 어떤 감정과 눈으로 맞아주며 거기에 있는 처남과 친척들을 만나볼수 있겠는가 하는 오만가지 생각으로 잠을 이루지 못하였다.
한 나라의 령도자로서 공식적이고 엄엄하리라고 생각했는데 위대한 수령님께서 그토록 허물없이 10대의 길림시절처럼 따뜻이 대해주시니 손원태선생은 무엇이라고 감사의 인사를 올려야 할지 몰랐다. 손원태선생은 어버이수령님의 자애로운 인품에 이끌리여 저도 모르게 수령님의 손금을 보아올리겠다고 하며 주석님은 손금이 참으로 희한하다고,주석님께서는 앞으로도 만백성의 칭송을 받을것이라고 스스럼없이 말씀드리였다. 모르는 사람은 불손하다고 할 이런 행동을 그이께서는 응석처럼 받아주시였다. 손원태선생의 그 응석에는 오랜 세월 간직해온 어버이수령님에 대한 그리움과 정,뜨거운 존경심이 엉켜있었으며 수령님의 모든 일이 잘되기를 바라는 진정이 어려있었다. 퍼그나 시간이 흘러 작별을 앞두었을 때에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손원태선생에게 우리 서로 헤여진지는 오래 되는데 앞으로 자주 와서 이야기나 나누자고 거듭 당부하시였다.
어버이수령님과 손원태선생사이의 뜨거운 인간적우정은 두번째로 조국을 방문한 주체81(1992)년에 더 숭고한 화폭으로 펼쳐졌다. 그해 어느날 또다시 손원태선생을 만나주신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자신의 곁에서 살고싶다는 그들부부의 진정을 반갑게 받아주시면서 《선생이 조국에 오면 나에게는 말동무가 생기게 되는데 그렇게 되면 나는 선생과 옛말을 하면서 오래 살수 있소.》라고 하시였다. 이때 손원태선생이 주석님께서 자기를 선생이라고 불러주시니 거북스럽기 그지없다고,그저 친동생처럼 원태라고 불러달라고 말씀올리였다. 그러자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좋다고,자신께서도 같은 생각이라고 하시면서 《그럼 이제부터 손원태,김성주라고 부르도록 하지.》라고 겸허하게 말씀하시였다. 너는 원태,나는 성주라고 부르며 반일애국의 포부를 안고 활약하던 길림시절의 숭고한 동지애의 모습이 재현되는 뜻깊은 광경이였다. 그후부터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손원태선생을 만나실 때마다 친동생을 대하시듯 《원태,그간 잘 있었나. … 건강은 어때.》라고 허물없이 말씀하시였다.
위대한 수령님께서 손원태선생을 만나주신 이야기는 온 남녘땅과 미국에 전해져 일대 파문을 일으켰다. 미국 네브라스카주 오마하시의 손원태교포가 김일성주석의 어릴적동무이고 60여년만에 김일성주석을 뵈왔다는 사실이 사진과 함께 신문을 통하여 알려지자 세상사람들은 참으로 희한한 일이라고 하면서 경탄을 금치 못해하였다.
위대한 수령님과 손원태선생사이에는 뜨거운 인간애와 함께 스승과 제자와의 관계로도 뜨겁게 맺어져있었다.
손원태선생은 위대한 수령님께서 세계정치문제는 물론 경제문제 등 모든것을 손금보듯 꿰들고계시였으며 여러모로 자기를 많이 일깨워주고 안목도 넓혀주시였다고 회고하였다.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명구와 격언,옛말 같은 형식으로 손원태선생에게 심오한 진리를 깨우쳐주군 하시였다. 그이께서는 어느날 그에게 사람은 언제나 입이 무겁고 경박하지 말아야 한다고 하시면서 옛날 사람들은 화는 입으로 나오고 병은 입으로 들어온다고 하였는데 말하자면 《화종구출》,《병종구입》이라고 가르치시였다. 또 언제인가는 《가화만사성》이라고 가정이 화목해야 모든 일이 잘되듯이 자신께서는 모든 사람들이 화목하게 살기를 바란다고 말씀하시였다.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주체82(1993)년 6월 어느날 손원태선생과 유람선을 함께 타시고 대동강을 유람하시면서 덕보에 대한 이야기를 들려주시였다. 그 이야기는 어느 나라 사신들이 우리 나라 봉건정부와 실력경쟁을 걸어오자 덕보라는 사람이 나가 이겼다는 이야기였다. 그이께서는 이 이야기를 하시며 조선사람은 머리가 좋고 재간도 있고 용감하기도 하다고 말씀하시였다. 그이의 이 말씀을 들으며 손원태선생은 조선사람은 어디에 가서 살아도 자기의 민족적근본,자부심을 잃지 말아야 한다는 귀중한 뜻을 받아안았다.
손원태선생은 위대한 수령님의 회고록을 스승의 가르치심이 집대성된 귀중한 재부로 간주하였다. 그는 조국방문의 나날 자신보다 동지들과 은인들을 더 많이 내세워주시고 생동한 사실자료들로써 혁명과 민족의 운명개척의 비결을 밝혀주시는 어버이수령님의 회고록 《세기와 더불어》 1,2권을 탐독한 다음 회고록을 20세기 정치사의 총화이고 대백과전서라고 찬양하였으며 회고록의 손정도목사에 대한 부분을 다 읽고나서 그이께서는 이름도 없던 자기 아버지를 훌륭한 사람으로 내세워주시였는데 이것은 물고기가 변하여 룡으로 된다는 뜻을 담은 《어변성룡》이란 말과 같다고 감격하여 말하였다.
손원태선생은 조국방문의 나날 자기가 소년시절에 존경하고 따랐던 김일성주석님께서 어떤 정치를 펴고계시는가 하는것을 알고싶었다. 이것은 사실상 친구이시며 스승이신 어버이수령님께서 한 나라 령도자로서 지니고계시는 품격과 정치실력을 객관적으로 재여보려는 마음에서였다.
그러한 그가 무엇보다도 감심한것은 조국이 위대한 수령님을 어버이로 모시고 한마음한뜻이 되여 서로 위해주고 사랑해주는 화목한 대가정이라는 점이였다. 손원태선생이 평양에서 처음 들었고 또 제일 많이 들은 말은 《이민위천》이란 말이였다. 언제인가 위대한 수령님을 모신 자리에서 그는 수령님께 큰일을 하신다고 말씀드린적이 있었다. 그때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그의 말을 가볍게 막으시며 《큰일은 다 인민들이 합니다. 인민대중의 힘은 무궁무진합니다.》라고 말씀하시였다. 그 말씀을 듣는 순간 손원태선생의 머리속에는 그 말씀이야말로 《이민위천》의 정치철학이 생동하게 집약되여있는 말씀이라는 생각이 번개치듯 떠올랐다. 그가 조국의 곳곳을 돌아보니 어느 공장,어느 땅에도 위대한 수령님의 발자취가 어리지 않은 곳이 없었다.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인민을 위하여 한평생 인민들속에 들어가계신다는 사실을 깊이 깨달을수록 손원태선생은
김일성주석님께서 인민대중중심의 정치로 공화국에 리상사회를 세웠다는 생각으로 가슴이 뜨거워졌다.
평양방문의 나날 손원태선생은 어버이수령님이시야말로 자기의 위대한 동지,자애로운 스승이신 동시에 절세의 애국자이시라는것을 심장으로 깨닫게 되였다. 그러면서 김일성주석님의 친구,스승,수령의 모습에 일관된 하나의 핵은 애국이라는것을 발견하게 되였다.
손원태선생은 리념에 앞서 나라와 민족을 앞에 놓으시는 위대한 수령님의 애국,애족,애민의 사상에 깊이 머리숙이지 않을수 없었다.
위대한 수령님께서 세우시고 이끌어나가시는 조국의 모습에 깊이 감동한 손원태선생은 서해갑문을 돌아보고 이런 글을 남기였다.
《아름답고 고상한 나라
후세들의 행복을 위한 건설의 나라
위대하고 인자하신 주석님을 따라
규합될 때 불가능이란 없으리》
영원한 조국의 품
손원태선생이 어버이수령님의 품속에 다시 안겨 보낸 나날들은 그가 조국에 대한 새로운 견해를 세우고 굳건히 다져온 나날이였다.
민족의 삶이 영원하듯이 그 터전인 조국도 영원하며 조국은 위대한 수령,위대한 령도자의 품이라는것,이것이 주체80(1991)년 5월부터 조국행을 하면서 그의 심장속에 뿌리내린 조국관이였다.
주체80(1991)년 5월 백두산밀영을 찾은 손원태선생은 사령부귀틀집도 돌아보고 김정일장군님께서 탄생하신 고향집도 돌아보면서 커다란 감동에 휩싸여 감상록에 다음과 같은 글을 남겼다.
《이 나라를 계승하여 받들어나가는 위대한 후계자가 탄생하신 곳을 돌아보고 내 나라는 계속하여 영원히 혁명과 건설을 하여 희망이 가득찬 나라가 되리라고 굳게 확신합니다. 김일성,김정숙,김정일 3대통운 만만세! 내 나라에 영원한 광명의 빛이 비친다.》
그의 이 글에는 우리 조국은 백두산장군들을 모시여 영원히 번영 하리라는 그의 신념이 비껴있었다. 하기에 민족의 대국상후에도 그는 마음의 기둥을 억세게 세우고 조국에로 향한 삶의 길을 끝까지 걸었던것이다.
그가 위대한 수령님을 마지막으로 만나뵈온것은 주체83(1994)년 5월 26일이였다. 이날 어버이수령님께서는 손원태선생을 위해 무려 4시간을 바치시였다. 이날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헤여지기에 앞서 자신께서는 손원태와 같은 친구를 늘그막에 다시 만난것을 행복으로 생각한다고,더 늙으면 조국에 오라고,조국에 묻혀야 한다고 뜻깊은 말씀을 하시였다. 그러시면서 이제 갔다가 8월달에 다시 와서 80돐생일을 쇠라고 하시였다.
손원태선생은 어버이수령님과 헤여질 때 건강에 류의하실것을 간청하면서 주석님은 120살까지는 문제없다고 무랍없이 말씀드리였다. 그러자 그이께서는 120살까지 살면 기적이라고 하시며 호탕하게 웃으시였다. 위대한 수령님의 이 호탕하신 웃음은 손원태선생이 들은 수령님의 마지막웃음이였다.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호탕하게 웃으시며 손원태선생과 작별하시였다. 그러나 그는 위대한 수령님과 영원히 헤여졌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어버이수령님께서는 비록 가시였어도 수령님과 꼭 같으신 위대한 김정일장군님께서 늘 그의 곁에 계시여 보살펴주시였던것이다.
손원태선생이 위대한 수령님의 서거후 그이의 령전을 두번째로 찾아 인사를 올리고 나올 때 경애하는 장군님께서 그에게로 다가오시였다.
그가 위대한 장군님의 두손을 마주잡은채 아무 말씀도 올리지 못하고 눈물만 흘리는데 장군님께서는 오히려 그를 위로하시며 이렇게 말씀하시였다.
《선생님,먼길을 수고롭게 와주시여 감사합니다. 수령님께서 앉아계시였더라면 얼마나 반가와하시였겠습니까. 수령님께서는 며칠전까지만 해도 선생님의 80돐생일상을 차려주시겠다고 하시였는데 일이 이렇게 되고보니 참 섭섭하기 이를데 없습니다. …
하지만 수령님 계실 때와 조금도 다름없이 지내주십시오.
…변함없이 잘 돌봐드리겠습니다.》
순간 손원태선생은 목이 꽉 메여올랐다. 손원태선생은 경애하는 장군님의 존귀하신 모습에서 어버이수령님의 자애로운 모습을 보았고 장군님의 음성에서 수령님의 음성을 들었다. 어버이수령님과 꼭 같으신 천출위인이 계시여 내 조국은 영원하다는 확신을 안겨주는 력사적순간이였다.
위대한 수령님께서 바라신것이라면 그것이 크든작든 기어이 관철해야 한다는것이 위대한 장군님의 철석같은 신념이고 의지였다. 그래서 위대한 수령님께서 생전에 이야기하신 손원태선생의 80돐생일상을 차려주는 문제까지도 마음속에 새겨두신 경애하는 장군님이시다.
바야흐로 다가온 80돐생일날 아침 손원태선생은 뜻밖의 큰 선물을 받아안았다. 위대한 수령님께서와 경애하는 장군님께서 보내주신 귀중한 선물들이였다. 위대한 수령님께서 생전에 몸소 마련하시였던 선물과 경애하는 장군님께서 보내주신 진귀한 과일바구니와 고급손목시계였다. 그날 저녁 손원태선생은 평양시중심부에 자리잡은 국가연회장에서 80돐생일을 맞게 되였다. 이날 생일연회에는 300여명의 각계각층 대표들이 초대되였으며 손원태선생을 따라 미국에서 온 친척들과 친지들이 다 참가하였다. 위대한 수령님의 생전의 뜻과 경애하는 장군님의 위임을 받들고 당과 국가의 간부들이 참석하였다. 그날 마이크앞에 나선 손원태선생은 조국과 민족을 위해 별로 한 일도 없는 자기가 이토록 크나큰 영광의 자리에 서고 뜨거운 환대와 축복을 받게 된것은 오로지 김일성주석님과 김정일령도자분의 하늘같은 은덕임을 잘 알고 앞으로 영원히 주석님과의 우정을 소중히 간직하고 민족을 위해 참답게 살아나가겠다고 다짐하였다. 국가간부들로부터 연회에 참가한 이름있는 학자들과 작가들,배우들이 련이어 축배잔을 들고와 손원태선생을 축하해주었다.
80돐생일을 쇠고난 후에야 손원태선생은 거기에 깃든 자세한 전말을 알게 되였다. 7월말경 어느날 위대한 장군님께서는 당중앙위원회의 한 일군에게 손원태선생의 생일을 어떻게 할 생각인가고 물으시였다. 그 일군이 위대한 수령님께서 생전에 여러번 말씀이 계신 일이기는 하지만 국상을 당한 때이니만치 생일축하연회를 하는것은 어울리지 않을것 같다는 말씀을 올리였다. 그러자 위대한 장군님께서는 그렇게 한곬으로 생각하면 안된다고 하시면서 수령님께서 안계신다 하더라도 손원태선생의 생일을 차려주어야 한다,오히려 수령님께서 안계시기때문에 더 크게 차려주어야 한다,바로 그렇게 하는것이 어버이수령님의 유훈을 받드는것으로 된다고 간곡히 말씀하시였다.
손원태선생이 화려한 저택을 받아안게 된것도 위대한 장군님의 은정에 의해서였다. 주체82(1993)년 6월 어느날 손원태선생의 부부는 평양시 교외의 숲속에 자리잡은 새 집에 들게 되였다. 그들부부가 새 집에 옮겨가 얼마간 지난 어느날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그들의 집을 찾아주시였다. 서둘러 인사를 드리는 그들에게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집이 어떤가고,마음에 드는가고 다정히 물으시였다. 손원태부부가 서로 다투어 집이 너무 희한하여 무엇이라고 감사를 드리였으면 좋을지 모르겠다고 하자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마음에 든다니 됐다고,여기는 공기도 좋고 건강에도 아주 좋은 지대라고 하시면서 김정일동지께서 여기에 새 집을 마련하였다고 하시는것이였다. 한번은 위대한 장군님께서 위대한 수령님과 함께 손원태선생의 집문제와 관련하여 협의하신적이 있었다. 당시 만경대일대에서는 손원태선생의 집을 건설하고있었다. 위대한 장군님께서는 새 집건설에 많은 시간이 든다는것을 아시고 손원태선생이 80고령이 다된것만큼 이미있는 좋은 저택들가운데서 골라주자고 제기하시였다. 그리하여 그들부부가 뜻밖의 새 저택을 받아안게 되였다. 조국과 민족을 위해 피 한방울 흘린적이 없고 벽돌 한장 들어올린적이 없는 머나먼 이국땅의 평범한 교포를 그토록 따뜻이 보살펴주시고 한 인간이 누릴수 있는 행복과 영광가운데서 가장 큰 행복과 영광을 안겨주시는 경애하는 김정일장군님의 사랑과 은정속에서 손원태선생은 온 민족을 품어안고 통일성업에로 이끄시던 위대한 수령님의 모습을 보았다.
손원태선생은 그후 력사적인 6.15북남공동선언이 채택되자 북남교류,협력의 새시대가 열린것은 어버이수령님의 통일유훈을 그대로 관철해나가시는 위대한 장군님의 현명한 령도의 결실이라고 생각하였다. 손원태선생은 위대한 수령님 서거후에도 위대한 장군님의 자애로운 손길에서 통일의 태양은 영원히 빛나고있음을 굳게 확신하였다. 위대한 장군님께서는 숭고한 도덕의리와 애국애족의 사상으로부터 출발하시여 손원태선생과 그의 가족이 애국애족의 길로 나가도록 따뜻이 손잡아 이끌어주시였다. 위대한 장군님께서는 그가 생일 90돐을 맞은 지난해 8월에는 뉴욕주재 우리 나라 유엔대표부 일군들에게 친히 과업을 주시여 그의 집을 방문하고 자신의 명의로 그의 생일 90돐을 축하하여주면서 어버이수령님께서 생전에 당부하셨던대로 건강관리도 잘하며 조국에 오고싶을 때 오도록 할데 대한 자신의 말씀을 전달하도록 하시였다. 조국으로부터 멀리 떨어진 미국땅에서 위대한 장군님께서 전해주시는 90돐생일축하인사를 받아안은 손원태선생은 뜨거운 눈물을 흘리였다.
머나먼 이역땅에서 대를 이어 계속되는 수령복을 누리며 영광의 절정에서 살아오던 손원태선생은 지난해 9월 28일 급병으로 사망하였다.
이 소식을 보고받으신 위대한 장군님께서는 매우 애석해하시며 즉시 다음과 같은 조전을 보내시였다.
《손원태선생의 유가족들에게
나는 손원태선생이 뜻밖에 급병으로 서거하였다는 슬픈 소식에 접하여 고인의 유가족들에게심심한 애도의 뜻을 표합니다.
김정일
주체93(2004)년 9월 30일》
뒤이어 손원태선생의 령전에는 위대한 장군님께서 보내주신 화환 이 진정되였다.
손원태선생의 유가족들은 그가 생전에 조국에 묻히기를 소원하였다는것을 조국에 전달하였다. 그리하여 육체는 죽었어도 위대한 장군님의 은정속에 그의 통일애국의 넋은 선군조국의 무궁한 번영과 더불어 길이 살아 맥박치게 되였던것이다.
* *
평범한 해외동포에 불과하였던 그가 나라와 민족의 자랑인 애국렬사로 영생의 삶을 누리게 된 사실을 놓고 우리는 무엇을 깨닫게 되는가.
손원태선생의 유가족은 이렇게 말하였다.
《위대한 김일성주석님의 뜻을 이어가시는 경애하는 김정일장군님의 품이 있어 주석님의 숭고한 인간적의리,민족애의 력사는 계속 흐르고있으며 7천만겨레의 통일대행진은 용용한 대하를 이루고있습니다.》
정녕 민족의 태양,통일의 태양은 온 삼천리강토뿐아니라 지구의 곳곳을 찬란히 비치고있다. 태양이 빛나는 우리 조국은 우리 혁명전 사들뿐아니라 온 나라,온 겨레가 안겨살 영원한 사랑의 품,위대한 어버이의 품인것이다.(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