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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동신문 일본반동들의 악랄한 반공화국경제제재책동
 (평양 6월 10일발 조선중앙통신)10일부 <로동신문>은 <일본반동들의 악랄한 반공화국경제제재책동>이라는 제목으로 된 개인필명의 글을 실었다.
 그 전문은 다음과 같다.
 일본반동들이 그 무슨 <핵문제>를 해결하기 위하여 우리에게 <경제제재>를 가해야 한다느니 뭐니 하는 따위의 희떠운 소리를 늘어 놓고 있다.
 이것은 어리석기 짝이 없는 행위이다.
 우리 인민은 공화국이 창건된 첫날부터 오늘에 이르는 기간 미국과 일본을 비롯한 국제반동들의 끊임 없는 봉쇄와 제재속에서 혁명과 건설을 승리적으로 전진시켜 왔다.이 과정을 통하여 경제적자립을 이룩하고 자기 힘에 의거하여 혁명과 건설을 전진시켜 나가는 인민은 그 무엇으로써도 굴복,질식시킬수 없다는것을 뚜렷이 보여 주었다.
 위대한 수령 김일성동지께서는 다음과 같이 교시하시였다.
 <조일 두 나라사이의 잘못된 과거를 청산하고 관계를 정상화하는것은 제2차세계대전이 끝난 다음 인차 해결되여야 할 문제였습니다.그러나 유감스럽게도 일본집정자들은 과거를 반성하고 옳바른 길로 나아가려는 일본인민들의 의사와는 어긋나게 우리 공화국에 대한 비우호적인 정책을 실시하였습니다.>
 일본반동들은 우리 공화국이 창건된 후 지난 수십년동안 반공화국적대시정책을 집요하게 감행하여 왔다.이에서 주요내용을 이루는것의 하나가 우리에게 경제제재를 가하여 우리를 경제적으로 질식시키려는것이였다.그들은 미제가 우리에게 경제제재조치를 취할 때마다 그에 맞장구를 치면서 우리에 대한 압력과 제재소동을 벌리는 등 못되게 놀았다.
 미국이 1949년에 <대공산권수출통제위원회>를 조작하였을 때도,1950년에 <재산통제규범>이라는것을 내놓았을 때도 일본반동들은 그에 편승하여 우리 나라에 대한 무역봉쇄와 재정적봉쇄를 실시하였다.이러한 책동은 우리 인민과 국제사회계는 물론 일본국내에서도 강한 반대에 부딪쳤다.
 1950년대 중엽에 이르러 우리 공화국과의 경제문화교류를 요구하는 일본인민들의 압력에 못 이겨 당시 일본총리였던 하또야마는 1955년 신년기자회견에서 <북조선과의 경제적관계를 개선하기 위해 회담할 용의가 있다>고 말하였다.이에 대하여 우리 공화국정부는 1955년 2월 25일 외무상성명을 발표하여 일본측의 경제관계개선용의를 환영한다는 립장을 밝혔다.
 이를 계기로 일본국내에서는 우리 공화국과의 경제문화교류를 촉진하려는 분위기가 높아 지고 그 실현을 위한 움직임이 활발해 졌다.
 그러나 일본당국은 정작 민간급에서 두 나라사이의 무역관계개선의 움직임이 보이자 이에 당황하여 조일무역을 허용하지 않기로 하고 1955년 10월 24일 각성 차관회의에서 우리 공화국과의 무역을 비롯한 교류를 일체 금지한다는 결정을 채택하였다.이것은 일본총리 하또야마가 표명한 <일조경제관계개선용의>가 한갖 겉치레에 불과한것으로서 우리 공화국에 대한 일본의 적대시정책을 반대하는 내외의 여론을 눅잦히고 국제여론을 오도하려는 기만술책이였다는것을 보여 주는것이였다.
 1957년에 등장한 기시내각때에도 사정은 마찬가지였다.
 일본정부의 반공화국적대시정책으로 하여 우리 공화국과 일본과의 무역은 정부급에서는 물론 민간급에서도 진행되지 못하고 있었다.다만 1956년 9월부터 중국의 대련항이나 홍콩을 경유하는 간접적인 형식으로 두 나라사이의 교역이 이루어 지고 있을뿐이였다.이것은 일본의 상사들이 중국이나 홍콩의 상사들과 계약을 하는 형태를 취하고 일본의 수출품은 중국의 대련이나 홍콩에서 륙지에 부리고 우리 나라의 수출품은 원산지를 중국이나 홍콩으로 하여 대련항과 홍콩에서 선적하며 중국은행과 홍콩은행을 경유하여 결제하는 방법으로서 그 거래절차가 매우 복잡하고 호상 불합리한것이였다.
 조일간의 관계개선을 요구하는 일본인민들의 투쟁이 강화되는데 위압된 일본정부는 1961년 4월에 조일무역을 허용하지 않을수 없었다.
 그러나 일본이 조일무역을 허용한것은 진심으로 두 나라사이의 선린우호관계를 개선하기 위해서가 아니였다.
 일본정부는 직접무역을 진행하는데서 중요한 문제의 하나인 직접결제금지조치는 여전히 해제하지 않고 있었다.따라서 두 나라사이의 직접무역이 승인되였다고는 하지만 무역결제는 간접적인 형식으로 이루어 지고 있었다.조일무역의 직접결제는 조일무역승인이 있은후 2년이 지나서야 실현될수 있었다.
 일본정부는 조일무역에 종사하는 일본의 수출업자들에 대한 수출은행융자를 승인하지 않았다.
 당시 우리 공화국과의 무역관계를 가지고 있던 일본상사들의 대부분이 중소규모의 회사들이였던것만큼 이들에 대한 수출은행융자의 금지는 두 나라사이의 무역관계발전에 적지 않은 지장을 주지 않을수 없었다.
 일본정부는 우리 공화국의 무역관계자 및 기술자들의 일본방문에 대해서도 금지조치를 해제하지 않았다.그리하여 우리 공화국과 일본과의 무역관계자 및 기술자들을 비롯한 인적교류는 호상성이 보장되지 못하고 일방적으로 진행되고 있었다.
 그후 일본이 우리 공화국의 무역관계자 및 기술자들의 일본방문을 허용했다고 하지만 인위적인 제한조치로 하여 1972년에 일본을 방문한 우리 나라 경제대표단성원은 7명,1973년에는 40∼50명정도에 불과했다.반면에 조선을 방문한 일본의 무역관계자와 기술자들은 이 시기 년간 500∼600명에 달하였다.
 일본이 1973년 12월에 승인한 수출은행융자에 대해 보더라도 그것은 3건의 기계 및 설비수출에 대한 융자로 그치고 1년후인 1974년 12월 일본수출입은행은 부당한 구실을 대고 수출은행융자의 제공을 거부하였으며 일본통산성도 수출보험업무를 중단하였다.
 일본은 우리 공화국을 경제적으로 봉쇄하기 위한 책동의 한 고리로서 우리 나라의 수출품에 대하여 고률의 관세를 시종일관하게 적용하여 오고 있다.
 일본은 우리 나라와 국가관계가 없다는것을 리유로 수입관세적용에서 우리 나라에 극심한 차별을 두고 있다.즉 일본은 다른 발전도상나라들에 적용하고 있는 <특혜세률>을 우리 나라에는 적용하지 않고 가장 불리한 <국정세률>을 그대로 적용하고 있다.일본에서 이 <국정세률>이 적용되고 있는 나라는 우리 나라를 포함하여 두개 나라뿐이다.
 일본은 미국의 책동에 의하여 조선반도정세가 악화될 때마다 우리에 대한 경제봉쇄의 도수를 높이였다.일본은 1990년대에 우리 공화국을 반대하는 미국의 고립압살책동의 돌격대로 나서서 <집단적인 제재>놀음에 누구보다도 앞장 섰다.지어는 국제기구들에까지 우리의 <핵의혹>설을 내돌리며 우리 나라에 대한 경제봉쇄를 강화하도록 추동질하였다.
 그러나 일본이 대조선경제제재책동으로 얻은것이란 아무것도 없다.그것은 오히려 우리 인민을 혁명적으로 더욱 각성시키고 분발시켰다.
 우리 인민은 일본의 경제제재책동에 자력갱생의 혁명정신을 높이 발휘하여 자립적민족경제와 나라의 물질기술적토대를 더욱 튼튼히 쌓고 국력을 끊임없이 강화하는것으로 대답하였다.일본반동들의 대조선경제제재책동은 승승장구하는 우리의 사회주의의 위력앞에 불안감과 초조감을 감추지 못하는 그들의 비렬성과 취약성을 세계면전에 스스로 드러내놓는것으로 되였을뿐이다.
 제국주의자들의 경제봉쇄의 장막을 밀어 제끼며 승리적으로 전진하고 있는 우리에게 또다시 경제제재를 가하여 그 무엇을 얻어 보려는것은 오뉴월의 개꿈과 같다.그 어떤 경제제재도 우리 인민앞에서는 맥을 추지 못한다.
 경제제재정책은 공인된 국제관계원칙에 어긋나는것이다.일본의 대조선경제제재책동은 새 세기 평화와 완화에로 나가는 전반적국제정세의 흐름에 배치되는것이며 조일평양선언의 정신에도 어긋난다.그것은 조일적대관계를 더욱 악화시키는것으로서 일본인민들의 지향과 리익에도 저촉된다.
 우리 인민은 혁명성과 신념이 강한 인민이다.일본은 우리 공화국에 대한 경제제재책동이 가져 올 후과에 대하여 깊이 생각해 보고 처신을 잘하는것이 좋을것이다.(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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