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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력사학학회 성토문 임진전쟁시기 일본침략군이 감행한 범죄적만행을 폭로
 (평양 5월 8일발 조선중앙통신)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력사학학회는 7일 임진전쟁시기 일본침략군이 감행한 범죄적만행을 폭로단죄하는 성토문을 발표하였다.
 성토문은 다음과 같다.

 임진전쟁은 1592년 4월 13일(음력) 일본이 명나라에로 가는 길을 열라는 황당한 구실밑에 조선을 강점하기 위하여 도발한 침략전쟁이였다.
 전쟁은 중간의 강화담판기간을 포함하여 1598년까지 7년동안이나 계속되였다.이 기간 일본군은 강점지역에서 수십만명의 조선인민을 학살하고 랍치해 갔으며 수많은 문화재들을 파괴,략탈하였다.
 일본침략자들이 조선에서 감행한 만행가운데서 가장 잔학한것은 무고한 인민들을 남녀로소 가림없이 무차별적으로 학살하고 코와 귀를 잘라간것이다.지금 일본 교또시에 있는 <귀무덤>은 우리 민족을 야수적으로 살해하고 온갖 민족적재난과 고통을 들씌운 일본의 죄 많은 과거를 보여 주는 또 하나의 력사적증견물로 되고 있다.
 코를 잃고 귀를 잃어 온전한 시체도 남기지 못한 령혼들의 절규가 오늘도 우리의 가슴을 쓰리게 하고 있으며 일본침략자들에 대한 우리 민족의 증오심은 용암처럼 끓어 오르고 있다.
 임진전쟁시기 일본침략군이 우리 민족에게 감행한 만행은 천추에 용납 못할 특대형국가범죄이다.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력사학학회는 정의와 평화를 사랑하는 인류의 량심앞에 임진전쟁시기에 감행한 일본의 과거죄행을 폭로단죄하기 위하여 이 성토문을 발표한다.

   1.<귀무덤>의 진상

 <귀무덤>은 오래전부터 우리 나라에 쳐들어 와 살인과 랍치,파괴와 략탈을 일 삼아 온 왜구의 후손들만이 고안해 내고 감행한 가장 잔학한 만행의 소산이다.
 <귀무덤>은 임진전쟁시기 도요또미 히데요시를 괴수로 한 일본집권층의 명령밑에 계획적으로 감행된 력사에 류례 없는 야수적인 조선인대량학살만행을 만천하에 고발하고 있다.
 당시 일본의 집권자들은 조선에서의 대량학살만행을 직접 지시하였으며 극력 조장시켰다.
 도요또미는 7개조로 된 <포고>라는데서 다른 나라 사람들의 목무덤을 만들려 한다고 하면서 남녀로소,승려에 이르기까지 모두 목을 잘라 일본에 보낼것을 명령하였다.(일본도서 <조선이야기> 권상 1672년)
 또한 도요또미는 <해마다 군대를 출동시켜 조선사람들을 온통 죽여 버려 조선을 빈 땅으로 만든 다음 서로(일본의 서쪽지역)의 사람들을 옮겨 조선에 살게 하고 동로의 사람들을 옮겨 서로에 살게 하면 10년후에는 반드시 성공이 있을것>이라고 떠벌이였다.(조선고전 <간양록> 1654년)
 이 계획을 실현하기 위하여 도요또미는 1597년 6월 쯔시마도주의 중신 야나가와 시게노부를 조선에 보내여 <우선 일본군은 전라도에 진격하여 전라도민을 일시에 남김없이 모두 죽이며 충청도,경기도와 그밖의 도에서는 알아서 평정하라.>고 하였다.(<고려재출진법도> 제17항)이때 도요또미는 <사람의 귀는 둘이라도 코는 하나이니 조선사람의 코를 베여 머리를 대신하라.군사 한명이 코 한되씩으로 수량이 찬 후에야 생포하는것을 허락한다.>고 코베기명령을 함께 하달하였다.(조선고전 <간양록>)
 당시 일본군졸들은 조선사람들을 포로 또는 강제랍치하여 뽀르뚜갈상인들에게 노예로 팔아 먹고 있었다.한되의 코를 베여 바친 후에야 조선사람을 <포로>로 잡는것을 허용한것은 자기 병사들이 살인명령을 어기고 <노예사냥>에 미쳐 돌아 갔기때문이였다.이 사실은 도요또미가 전 조선의 식민지화를 위하여 조선사람의 멸종을 노리고 있었다는것을 보여 준다.
 이에 따라 일본군우두머리들은 군졸 1인당 조선인 코 3개씩 벨것을 명령하였으며(일본도서 <기요마사조선기>,<기무라 마따조각서>) 베여 낸 코수자에 따라 <군공>을 평가해 줌으로써 일본군졸들은 무고한 백성들을 마구 죽이는것을 출세의 길로,도락으로 여기면서 조선인대량살륙에 피눈이 되여 날뛰였다.
 침략군의 우두머리들은 부하들이 자른 조선사람의 코를 모아 도요또미가 파견한 <메쯔께>(위법감찰관)들에게 보냈으며 <메쯔께>들은 살인자들에게 <코확인장>을 내여 주고 코는 일본에 보냈다.<코수 365개를 받아 코수집관에게 인도하였음>,<죽인 사람의 코 10,040개를 확실히 인수하였음>,이것은 적장들이 발급하였던 <코수집장>과 <메쯔께>들이 내준 <코확인장>의 한 토막이다.
 도요또미는 조선에서 보내온 코를 받아서는 직접 세여 확인하고나서 <수고했다>고 <감사장>을 보내여 <격려>해 주었으며 그의 측근신하들도 그 본을 따 <수고했소>라고 하면서 살인자들에게 <감사장>을 보내주었다.
 적들의 살인죄악을 고발하는 이러한 <코수집장>과 <코확인장>,<감사장>들은 오늘까지도 일본의 야마구찌현 문서보관소,아마기시의 아끼즈끼향토관,가고시마현 력사자료쎈터,도꾜대학 사료편찬소를 비롯한 여러 장소에 보관되여 전해 지고 있다.
 우두머리들의 명령과 부추김을 받은 군졸들은 어떻게 하나 <군공>을 세워 보려고 조선사람이라면 <남자와 녀자를 불문하고 갓난 아이까지 모조리 죽여 그 코를 잘라 그날로 소금에 절여 코수집관에게 보냈다.>(일본도서 <모또야마 부젠노까미 야스마사부자전공각서>)
 일본침략자들은 산 사람의 코까지 베여 냈다.전후에도 수십년간 조선의 이르는 곳마다에 코 없는 사람이 수많이 보였다고 한 사실은 일본의 야수성을 그대로 보여 주고 있다.(조선고전 <지봉류설> 권3 병정부 왜적)
 임진전쟁에 참가하였던 오까우찌 히데모또는 도서 <조선이야기>(권하)에서 <귀무덤>에 묻힌 수가 <21만 4,752>로서 그 가운데 조선사람의 수는 <18만 5,738>이라고 밝혔다.
 학살된 사람 모두가 코를 잘리운것은 아니였고 또 베여 낸 코가 빠짐없이 <귀무덤>에 묻혔다고 볼수 없으므로 당시 적들이 학살한 조선사람의 수는 이보다 훨씬 많았을것이 명백하다.
 기록에 남은 자료들만 보아도 일본군은 2차침공때만도 11만 3,300여명을 살해하였다.(중국도서 <중조관계사론문집> 세계지식출판사,1988년) 여기에 1차침공때 적들이 부산,동래,한성,평양,진주 등지에서 대량학살한 사람들까지 합치면 그 수는 무려 수십만명에 달한다.
 임진전쟁시기 적들이 감행한 만행은 코자르기에만 그치지 않았다.적들은 조선사람의 눈알까지 뽑아 냈으며 이르는 곳마다에서 수많은 조선사람들의 목을 잘라 매달아 놓았다.
 2차침공때 적들은 조선사람들과의 교전끝에 코를 베는것과 함께 눈알도 뽑았으며(일본도서 <고려일기>) 금산에서는 군영앞에 나무를 세워 놓고 우리 나라 사람들의 머리를 주런이 매달아 놓았는데 썩어서 뼈는 떨어 지고 머리칼이나 망건만 걸려 있었다고 한다.(조선고전 <쇄미록>상 권1)
 일본침략자들의 야수적인 만행으로 인하여 부모를 잃은 자식은 고아가 되고 남편을 잃은 안해는 과부가 되였으며 집들은 불 타 버리고 마을은 페허로 되였다.수도 한성에서만도 죽은 사람이 얼마인지 알수 없고 죽은 사람의 제사를 지내면서 울고 불며 하는 참상을 차마 눈 뜨고 볼수 없는 형편이였다고 한다.(<선조실록> 권59 28면 1월 계해조)
 이 모든 사실은 일본침략군에 의한 악랄한 코베기와 대량학살만행이 조선의 식민지화와 조선인멸종을 노리고 계획적으로 감행된 일본의 특대형국가범죄였다는것을 보여 준다.
 <귀무덤>은 자기의 야수성을 가리워 보려고 파렴치하게 책동하여 온 일본 력대위정자들의 교활성의 산물이다.
 <귀무덤>의 원래 이름이였던 <코무덤>이 <귀무덤>으로 달라진 사실이 그것을 말해 준다.
 도요또미의 측근의 한 사람으로서 <귀무덤>을 만들고 <공양>하는데 직접 관여한 상국사의 주지 쇼따이는 잘라 온 조선사람의 코를 묻어 무덤을 만들고 <코무덤>이라고 이름 지었다고 하였으며(일본도서 <일용집> 1597년 9월 25일항) 1607년에 일본에 갔던 리조통신사의 부사는 자기 견문록인 <해사록>에서 <왜의 교또교외에 우리 나라 사람의 코무덤이 있다.임진란때 우리 나라 사람의 코를 모아 한곳에 묻었다.>고 하였다.이것은 당시 무덤이 <귀무덤>으로가 아니라 <코무덤>으로 알려 져 있었다는것을 말해 준다.
 하기에 1898년 <공양비>건립자들도 처음에 <코무덤>이였던것이 와전되여 <귀무덤>으로 되였다고 하였다.(<귀무덤수복공양비>)
 그러면 어떻게 되여 <코무덤>이 <귀무덤>으로 불리우게 되였는가.
 그것은 그후 일본집권자들이 <코무덤>이라는 명칭이 너무 잔인한 인상을 준다는데 신경을 쓰게 된 사정과 관련되였다.
 통치층의 립장을 대변하여 17세기 전반기의 학자 하야시 라잔은 처음으로 <코무덤>을 <귀무덤>이라고 개칭하여 기록에 남겼다.이때 <코무덤>이라고 씌여 있던 비석을 철거하고 <귀무덤>으로 쓴 비석을 대신 세웠다는 설도 있다.
 그리하여 력사무대에서 <코무덤>이라는 명칭은 점차 자취를 감추고 <귀무덤>으로 불리우게 되였다.그러나 명칭이나 바꾼다고 하여 일본침략자들이 조선에서 감행한 만행의 흔적을 절대로 가리울수도 지워 버릴수도 없다는것은 자명하다.
 <귀무덤>은 도요또미의 <무공>,일본의 <국위>를 시위하기 위한 일본통치배들의 야수성,호전성을 뚜렷이 립증하고 있다.
 이 세상에 침략과 략탈의 행적을 자랑하고 싶어 하는것은 호전분자들뿐이다.일본의 당대 최고실권자였던 도요또미 히데요시는 <군이 이기면 공을 후세에 보이는것은 고금의 통례이다.>고 말한바 있다.이 자는 바로 이러한 교리에 근거하여 자기의 <무공>을 과시하려고 세상에 류례 없는 괴이한 무덤을 만들게 하였던것이다.
 <귀무덤>을 만들게 한 도요또미의 이 진의도를 력대 일본인들도 인정한바 있다.나까이 지꾸잔이라는 자는 전란후에 조선과 명나라사람들의 <자른 귀를 거두어 교또 방광사 등에 묻고 경관(전투에서 죽은 적의 시체를 모아 그우에 흙을 씌워 사람들에게 보이는 일종의 전승기념물)으로 삼았다.>(일본도서 <일사> 1799년)라고 하였으며 1705년에 출판된 책 <조선군기대전>(권48)에는 <귀,코를 모아 수도근처 히가시야마대불전가에 묻게 하고 귀무덤이라고 이름 지어 후세까지 우리 조정의 영관(경관과 같은 뜻)으로 삼았다.>라고 서술되여 있다.
 조선인대량살륙을 목적으로 일본지배층에 의하여 계획적으로,의도적으로 감행되고 은페된 전대미문의 살인만행과 일본침략자들의 호전성,야수성을 폭로단죄하는 력사적인 증거물의 하나가 바로 <귀무덤>이다.

   2.대량적<사람략탈>과 문화재략탈

 임진전쟁기간 일본침략자들은 10여만명의 조선사람들을 닥치는대로 끌어 갔으며 수많은 국보급 문화재들을 파괴하고 략탈해 갔다.
 적들은 조선에서 수많은 사람들을 랍치하여 일본으로 끌어 갔다.하기에 학계에서는 일본의 조선에 대한 침략전쟁을 <사람략탈전쟁>이라고도 부르고 있다.
 <사람략탈>만행을 직접 지시한것은 일본의 집권자인 도요또미 히데요시였다.그는 부하들에게 보낸 <명령서>라는데서 <조선인을 잡아 두었다가 세공을 하는 자 그리고 봉관(옷 만드는 사람),재간 좋은 녀자가 있거든 진상>하라고 지시하였다.
 일본침략자들이 가장 많이 끌어 간것은 조선의 수공업자들이였다.특히 일본에서 <야끼모노(도자기류의 총칭)전쟁>이라고 전해질 정도로 적들은 우리 나라에서 수많은 도자기들을 략탈해 가는것과 함께 많은 조선인도공들을 랍치하여 갔다.남원에서만도 박평의,심당길 등 43명의 도공들이 랍치되여 끌려 갔다.랍치 되여 끌려 간 조선인도공들에 의하여 일본 서남 여러 지역에서는 사쯔마야끼,아리따야끼,이마리야끼,가라쯔야끼 등으로 불리운 도자기문화들이 발전하게 되였다고 한다.
 일본군은 옷 만드는 사람들,의사,인쇄기술자,유학자들까지 끌어 갔다.당시 일본군에게 랍치되여 간 조선의 한 유학자는 <왜선안에는 우리 나라의 남녀가 태반이나 되고 바다가에는 시체가 너저분히 쌓였다.울음소리 하늘에 사무치고 조수 또한 목 메여 운다>라고 묘사하였다.(조선고전 <간양록>)
 조선의 젊고 예쁜 녀자들을 바치라는 도요또미의 명령(일본도서 <나베시마가문서>)에 따라 침략자들은 수많은 조선녀성들을 끌어 갔으며 지어 <성봉사>까지 강요하였다.이에 대하여 <쇄미록>(상 권1)에서는 <왜적들이 령남의 사녀들가운데서 예쁘장한 녀자들을 골라 5척의 배에 가득 실어 먼저 일본에 보내였는데 그들에게 머리를 빗고 분칠하고 눈섭을 그리게 하였다.저들의 뜻을 만족시켜 주지 않으면 여러 도적놈들이 돌아 가며 간음하였다.>고 폭로하였다.이것은 20세기 <일본군성노예>만행이 그 선조들에 의하여 수백년전에 벌써 감행되고 있었다는것을 보여 준다.
 임진전쟁시기 일본에 끌려 간 조선사람의 수가 10여만명이였다고 하니 침략자들의 랍치만행이 얼마나 악착하였는가를 잘 알수 있다.
 인정도 풍토도 메마른 일본땅에 끌려 가 눈물속에 살다가 무주고혼이 된 사람들의 유적이 오늘도 남아 있어 <귀무덤>과 함께 죄악에 찬 일본의 력사를 통절히 꾸짖고 있다.
 일본침략자들의 야수적인 만행가운데서 절정을 이룬것은 조선사람들을 노예로 팔아 먹은것이다.
 당시 일본인 노예상인들이 침략군과 동행하면서 조선사람들의 목에 노끈을 걸어 장대로 밀어 내며 끌어 가던 참상이 게이넨이란자의 <조선일일기>에 여실히 묘사되고 있다.
 조선인노예의 값은 매우 눅거리여서 에스빠냐상인 아비라 히론은 <이 왕국에도 포로를 만재한 많은 배를 몰아 왔는데 내가 본 포로는 실로 눅은 값이였다.>라고 하였다.(에스빠냐도서 <일본왕국기>)
 이딸리아인 프란체스꼬 카를렛티는 나가사끼에 갔다가 5명의 포로를 샀는데 이때 포로 한명은 은 24몸메 즉 쌀 2석 4두의 값으로서 당시 진귀한것으로 치던 비누값으로 환산하면 겨우 2장분에 해당한것이였다고 한다.유명한 화가 루벤스(1577∼1640년)가 그린 <조선옷을 입은 사나이>라는 그림의 주인공청년은 카를렛티가 이딸리아에 데려 간 노예였다.
 일본침략자들은 조선사람들을 랍치하여 끌어 갔을뿐아니라 조선의 모든것을 파괴하고 략탈해 갔다.
 부산에 제일 먼저 상륙한 적의 선봉장 고니시 유끼나가의 부대는 부산진성공격에 앞서 성변두리의 민가를 모조리 불 살랐으며 적장 가또 기요마사가 경주의 불국사를 불 태워 버리자 도요또미는 <격려>편지를 보내주었다.
 침략자들은 수도인 한성(서울)을 점령한 후 종묘를 불 사르고 선릉,정릉 두 왕릉들도 파헤쳐 무덤안의 부장품을 략탈해 갔으며 그것도 성차지 않아 관을 불 태워 버리는 만행도 꺼리낌없이 감행하였다.(<선조수정실록> 권26 25년 6월,권27 26년 5월)
 일본군이 2차침입때 저지른 만행에 대하여 리조정부의 령의정이였던 류성룡은 <적이 삼도(전라,경상,충청도)를 유린하며 지나는 곳마다에서 집들을 모두 불 사르고 인민들을 살륙하였다.>고 규탄하였다.(<징비록> 권2 총론)
 적들은 조선의 귀중한 문화재들도 수많이 략탈해 갔다.
 당시 적우두머리들의 략타만행은 더 말할것도 없고 배사공,운반공,천민 등 하층민들까지도 조선에서 문화재들을 략탈하여 가난의 고통에서 벗어 나 보려고 날뛰였다.(뽀르뚜갈도서 <일본사>)
 일본침략자들은 조선에서 서적들을 대대적으로 략탈해 갔다.도요또미의 양자이며 침략군의 총대장이였던 우끼다 히데이에는 서적들을 략탈하여 도요또미에게 바치고 마나세라는 의사에게도 책이 든 궤짝 수십개를 <선물>로 주었다.도요또미의 대관으로 활동한 이시다 미쯔나리는 우리 나라의 국보인 <고려대장경>을 모두 략탈해 갔다.그리하여 임진조국전쟁이전에 조선에서 출판된 서적의 대부분이 일본에 실려 갔다.도적질해 간 이 도서들은 응당 주인에게 반환되여야 하였음에도 불구하고 그 일부가 오늘도 뻐젓이 일본의 봉좌문고(3,000권),남규문고(3,000권),창고관문고(3,000권),존경각문고(1,073권) 등에 소장되여 있다고 한다.
 적들은 책만이 아니라 동활자와 인쇄기까지 략탈해 갔다.우끼다는 한성에 들어 갔을 때 남산기슭의 정부 교서관에서 동활자 약 9만자와 인쇄기계를 략탈하여 일본에 날라 가 도요또미에게 바쳤다.
 침략자들은 많은 미술작품들도 훔쳐 갔다.그 가운데 알려 진 국보급미술작품만도 <보살삼존십왕도>,<당회석가존>,<명부십왕업심판도>,<양류관음상>,<오불존상> 등 수십점이 있다.그밖에 유명한 조선불교미술작품의 대다수가 일본에 있다고 한다.
 일본군이 략탈해 간 조선종은 출석사,혜일사,서대사 등에 남아 있다.
 적들은 지어 조선의 동식물까지 빼앗아 갔다.도요또미는 범고기가 로화방지에 좋다고 하여 잡아 보내게 하였으며 이때문에 함경도에 기여 들었던 적장 가또는 범사냥에 미쳐 돌아 갔다고 한다.지금 일본에 서식하는 까치는 일본군이 조선에서 가져다 번식시킨것이고 후시미성주변의 참중나무와 사가현 광택사의 거대한 소철나무는 가또가 가져다 심은것이라고 한다.
 하기에 일본인학자까지도 <히데요시의 침략전쟁은 조선문화를 깡그리 일본에 날라 간 문화략탈전쟁이기도 하였다.>고 개탄하였다.

   3.임진전쟁의 교훈

 임진전쟁의 참화는 일본의 죄 많은 과거를 고발하며 현 일본당국이 성근하게 속죄할것을 요구하고 있다.
 <귀무덤>은 너무도 많은것을 잃은 우리 민족의 불행했던 과거를 깨우쳐 주는 원한과 분노의 상징이며 우리 인민에게 너무도 큰 아픔과 상처를 남긴 일본의 죄많은 과거의 표적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본은 임진전쟁을 취급한 <걸작>이라고 하는 도서들(<문록경장의 역>,<일선관계사연구>)에서 <귀무덤>에 대한 언급을 피하였으며 수많은 청소년들을 대상으로 한 <도요또미의 전기>들에서는 <귀무덤>은 말할것도 없고 조선침략부분마저 완전히 삭제하여 버렸다.
 일본소학교 교과서들에는 <코베기>를 언급한것이 하나도 없고 중학교 교과서 7종가운데 3종만이 교또무덤사진을 <귀무덤>이라고 밝히고 <조선군민의 귀와 코를 묻은 무덤이다.>라고 간단히 언급하였을뿐이며 고등학교 력사교과서 20종가운데서 5종에는 교또무덤사진을 <귀무덤>이라고 쓰고 <조선에서 전공을 표시하기 위하여 보내온 코를 묻어 희생자를 공양하기 위하여 건립한것이다.>라고 함으로써 비렬하게도 자라나는 새 세대들에게 야마또민족의 <우월성>과 <자비심>을 선전하기 위한 자료로 써 먹고 있다.
 죄 많은 과거를 애써 감추려는것은 그 과거를 되풀이하려는 속심의 표현이다.
 오늘 일본에서 <히데요시>라는 제목의 력사편집물이 텔레비죤으로 특별방영되고 신문과 방송들에 특집으로 소개되며 그의 <령혼>을 위로한다는 교또 호고꾸진쟈참배,도요또미와 련관된 지역의 개발과 관광 등 미친듯이 일고 있는 도요또미선풍은 또다시 해외침략에로 나가려는 일본당국의 책동을 뚜렷이 엿볼수 있게 해주고 있다.
 임진전쟁도발의 주범이며 조선인대량살륙과 랍치,조선문화재파괴략탈의 원흉인 도요또미 히데요시는 침략과 략탈의 대명사이며 근대에 일본이 도발한 모든 전쟁은 그의 침략전쟁을 시원으로 하고 있다.
 왜구의 호전성과 야수성,략탈성을 젖줄기로 일본제국주의라는 무서운 흡혈귀가 생겨 났고 그것을 뿌리로 일본군국주의라는 교활한 독버섯이 돋아 났다.
 독을 품고 있는것들은 자기를 더욱 치장하는 법이다.
 세월이 흘러 가고 산천이 변한다고 하여 우리 인민이 가슴속에 아픈 상처를 남긴 원쑤를 잊었다고 생각해서는 안된다.
 반성은커녕 침략을 미화분식하며 죄악의 력사를 되풀이하려는 일본의 파렴치한 행위는 우리 민족의 분노를 더욱 불러 일으키고 있다.
 오늘 일본이 조선사람의 코와 귀를 베여 <귀무덤>을 만들고 수많은 문화재와 수십만명의 인민을 략탈,살해,랍치해 갔으며 근대에 와서는 840만여명의 조선인을 강제로 련행해 간 자기의 죄 많은 과거를 성실히 반성하고 청산할대신 <랍치자문제>해결이요,북조선의 <미싸일위협>이요 하면서 <북조선을 선제공격해야 한다>고 망탕 줴쳐 대고 재침준비를 다그치며 우리 공화국을 목표로 군사정탐위성까지 쏴 올린것은 실로 언어도단이며 어불성설이다.
 력사는 지울수도 위조할수도 없다.일본은 조선민족에게 저지른 죄악의 력사에 대하여 솔직히 인정하고 후대들에게 일본이 다시는 범죄의 길을 걷지 않도록 깨우쳐 주어야 하며 조일평양선언에 서약한대로 죄 많은 과거를 깨끗이 청산하고 조일국교정상화를 위하여 노력해야 할것이다.
 세계의 량심은 과거를 반성하는 일본,이웃과 공존,공영하는 평화애호적인 일본의 개신된 모습을 보고저 하며 일본당국이 해외팽창야망을 당장 철회하고 더는 파렴치한 책임회피로 자신들의 호전성과 침략성을 가리우려는 도덕적저렬성을 드러내지 않기를 바라고 있다.
 일본은 <랍치자문제>를 들고 다닐 자격이 없으며 <미싸일위협>설을 고집할 명분이 없다.오직 자기의 잘못을 진심으로 반성하고 성근하게 청산하는 길만이 <귀무덤>의 주인공들을 비롯하여 원한 품고 쓰러진 모든 조선사람들의 령혼에 대한 성실한 공양으로 된다는것을 명심해야 한다.
 이것이 바로 임진전쟁의 교훈이며 가르침이다.일본당국자들은 마땅히 력사의 이 교훈을 잊지 말고 속죄의 길로 용약 나서야 할것이다.
 우리는 이 기회에 덜된 사람은 자기의 잘못을 변명하려 하고 참된 사람은 잘못을 고치려고 노력한다는 일본속담을 상기시키는바이다.(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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